최지혜의 예술 칼럼 (255)
이것도 예술인가?
뉴욕에 머무르면서 전위적 퍼포먼스와 해프닝, 회화, 조각 등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쿠사마 야요이는 팝 아티스트의 전설인 앤디 워홀과 같은 세계적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일상적인 사물의 재발견을 표현한 설치 작품과 행위 예술들을 선보였다.
1960년대 후반 들어서 그녀가 제도권 전시장 밖으로 창작의 시공간을 확장하면서 매진한 해프닝과 퍼포먼스도 그 무렵 서구에서 유행한 비주류 예술 운동의 일환 중 하나였다.
<육체의 향연 (Body Festivals)>(1967)을 조직한 쿠사마 야요이는 알몸 퍼포머들을 고용해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보다 더욱 많은 신문 기사를 장식했다고 주장했다.
1968년 그녀는 또 다시 알몸 퍼포먼스를 계획했다.
<해부학적 폭발 (Anatomic Explosion)>은 “주식으로 마련된 자금이 전쟁에 사용된다”는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며 뉴욕 증권 거래소에 반대하는 알몸 퍼포먼스였다. 락앤롤 뮤직에 맞춰 폴카 도트를 온몸에 그린 알몸의 퍼모머들이 춤을 추며 빙빙 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속에서 폴카 도트를 가진 월 스트리트 남자들을 몰아내자라고 소리를 쳤다.
<자기 소멸 (self Obliteration)>(1968)은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실험적 영화로 연출하여 기록한 영상작업이다.
또한 그녀는 베트남전 참전 반대로 뜨거워지던 미국 사회의 반전 문화와 1968년 미국 대선을 기회 삼아서, 센트럴 파크와 브루클린 다리 등지의 공공장소에서 알몸의 퍼포머들로 구성된 반전 해프닝도 기획했다.
전쟁을 반대하며 벌인 이 퍼포먼스에서는 알몸의 남성은 피켓을 들고 있고, 알몸의 여성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그녀는 게이 결혼식도 또한 의도 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던의 꿈틀거림 속에서 그녀가 당시의 사회적 개념과 통념에 반기를 제시한 것이다.
그녀의 악명이 점점 사그라 들 때쯤, 그녀는 자신의 전략을 바꿨다.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nudity love sex & beauty’라는 타블로이드 잡지 <쿠사마 의식(儀式) (Kusama orgy)>도 간행하고 하고, 소설도 썼다. 또한 ‘Nude Fashion Company’라는 이름아래 자신만의 샵을 열어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팔기도 했고, 자신의 그림과 조각들로 구성된 무대를 만들어 패션쇼도 열었다.
그녀는 폴카 도트와 같은 무한 패턴이 있는 튜닉도 만들었고, 신체의 은밀한 부분이 노출되도록 구멍을 낸 옷들도 손수 디자인하고 만들었다.
또한 ‘쿠사마 엔터프라이즈’을 만들어 아트 활동을 조직하면서 기존의 보수적인 예술로부터 더욱 멀리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런 다양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1973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최지혜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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