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70주년의 해에 코로나 19때문에 폐관 위기에 처한 ‘이미륵 문화공간’
뮌헨은 독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지만, 한국 영사관도 한인회관도 없다.
한인사회의 구심점이 될 만한 곳이 없다. 2018년 11월 뮌헨 대학이 있는 예술의 거리 슈바빙에 ‘이미륵 문화공간’이 문을 열었다.
이미륵은 누구인가?
사실 대다수 한국인은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수필가 전혜린이 소개한 재독 한인 작가 정도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런 그의 이름을 딴 ‘이미륵 문화공간’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와 관련돼 회자하는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36년 스웨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젊은 독일 남자가 이미륵을 붙들고 맹렬히 히틀러 찬양을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동양인 남자가 그 사람한테 “히틀러가 누구요?”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젊은 독일 남자는 이성을 잃고,
“당신,
어느 나라에서 왔소?”하고 되물었다.
동양인 남자는 “나는 독일에서 왔소.”라고 답했다.
히틀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당당하게 그의 존재를 무시했던 사람이 바로 이미륵이다.
이미륵의 본명은 이의경이고 미륵은 아명이다. 1899년 해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때 나라를 잃었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고, 일제에 쫓겨 상해를 거쳐 1920년 독일로 망명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학과 동물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그는 1931년 작가로 변신했다.
1946년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자 독일 신문들이 다투어 찬사를 보냈다. 한 잡지는 “올해 독일어로 출간된 가장 훌륭한 책은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이 썼다. 바로 그 사람이 이미륵이다.”라고 썼다. 독일어로 쓴 그의 문체가 얼마나 수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과장되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 문장이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미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일화가 또 있다.
한국 독자에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이란 책을 통해 잘 알려진 쿠르트 후버 교수가 독일의 저항단체 ‘백장미단’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3년 그가 교수형에 처하자 많은 사람들이 후버 교수의 가족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미륵은 달랐다.
이미륵이 길에서 후버 교수의 부인인 클라라를 만나면 주저하지 않고,
“클라라!”하고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했고,
도움을 주었다.
이런 이미륵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훗날 “이미륵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다.”라고 칭송했다.
이미륵이 어떤 성정을 지닌 사람인지?
그의 인품이 얼마나 올곧은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이미륵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이는 수필가 전혜린(1934~1965)이다.
그녀는 뮌헨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다.
그녀가 뮌헨에서 공부할 무렵,
이미륵은 이미 독일 문단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전혜린보다 앞서서 독일에 왔고 독일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고 있던 이미륵의 존재는,
전혜린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 같다.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아름다운 문체로 독일인의 감성을 자극했고,
우리나라를 독일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미륵이 뮌헨에 살 때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었다.
나치 정권은 수많은 서적을 불태워버렸다. 전쟁이 끝났지만, 사람들의 삶은 피폐했다. 문학작품에 목이 말랐지만 읽을 만한 책도 많지 않았다. 이 시기에 낯선 동양인이 수려한 독일 문체로, 동양 정서가 물씬 풍기는 한국 이야기를 발표한 것은 한편으로는 위안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미륵의 존재는 ‘이미륵 묘지기’라는 별명이 붙은 송준근(이미륵 기념 사업회 고문)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송준근은
1970년 광부로 독일에 왔다.
낯선 땅 독일에 와서 숱한 어려움을 겪던 그는 간호사로 독일에 온 아내를 만나,
1982년 뮌헨으로 거처를 옮겨 삶의 뿌리를 내렸다.
그런 그에게 독일은 어쩌면 커다란 벽이었을 수 있다.
가난한 나라를 떠나 돈을 벌기 위해 온 나라가 독일이었다.
송준근은 1992년 우연히 독일 문단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을 독일에 알리는 데 앞장섰던 이미륵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져,
묘지마저 잊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뜻 있는 동포들과 함께 매년
3월마다 이미륵 박사를 추모하기 시작했고,
이 일을
30년에 걸쳐 지속하였다.
이미륵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독한 협회와 한독협회가
2년마다 한 번씩 문화,
정치,
경제 분야에서 독일과 한국 양국 교류에 큰 역할을 한 이들을 선정해서 시상하고 있다.
송준근은 이미륵 박사가 한국과 독일 교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를 계기로 독일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고양하고,
제대로 된 한국 문화원 하나 없는 뮌헨에 한국 문화의 씨앗을 뿌리기로 한다.
그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희사하여 뮌헨 슈바빙 거리에
2018년 ‘이미륵 문화공간’을 개관하였다.
송준근을 포함한 많은 동포들이 노력한 결과,
잊혀가던 이미륵 박사의 시신을 그래펠링 묘지에 영구히 안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륵 문화공간이 송준근을 포함한 뜻있는 동포들의 힘으로 개관하였지만, 상주 직원을 둘만큼 재정이 어려웠다. 개관 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2020년 초, 새로 임원을 맡은 3명의 임원진이 이미륵 문화공간을 뮌헨의 한국문화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한국 영화 상영, 한국사 모임, 철학 모임, 독일어 강좌 등의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런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재능을 기부하면서 이미륵 문화공간은 뮌헨 한인 사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코로나
19가 확산하자,
독일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의욕적으로 새롭게 출발한 이미륵 문화공간은 휴관하게 되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미륵 문화공간 후원금도 끊어졌고 급기야 월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송준근이 이미륵 문화공간을 만들고자 앞장섰던 것은, 한국과 독일 문화 교류의 장을 연 이미륵 박사의 공을 기리고, 독일에서 자란 대한민국 동포 2. 3세에게 한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미륵 문화공간이 의욕적으로 변신하려던 시기에 코로나 19가 확산하여 장기간 휴관에 들어갔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후원이 끊어져 문을 닫게 되었다.
올해는 이미륵 박사가 일본 경찰에 쫓겨 독일에 도착한 지 100주년이고 타계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큰 규모의 추모음악회를 포함해 많은 의욕적인 기획이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고, 폐관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륵 문화공간에는 한국 교민들이 읽을 수 있는 한국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한인들이 기증한 책이다. 이미륵 문화공간이 존속하기 어렵게 되자, 한인들에게 어렵게 모은 책을 다시 기증하는 행사를 했다.
어려운 시기에 독일에 와서 한국 문화의 씨앗을 뿌린 이미륵 박사, 그의 뜻을 기려 평생의 재산을 희사하여 이미륵 문화공간을 조성한 송준근, 이들의 노력은 코로나 19에 밀려 이대로 물거품이 되어야 하는지? 한인이 정성껏 모은 책을 되돌려 주는 행사를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미륵은 독일에 사는 한국 교민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에 가까운 아주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이미륵 문화공간 뮌헨에서 자라고 있는 한인 2.3세들이 한국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배우고, 독일인에게 소개하고 전파할 수 있는 곳이다. 이미륵 박사의 뜻이 오래도록 전승될 수 있도록, 한국 대사관, 한국 문화원, 독일에 진출한 한국 기업, 뜻있는 독지가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프리랜서 박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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