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발견한 커피의 이야기

by 편집부 posted Nov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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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에이미와 헝데부 (Rendez-vous) (64)
파리에서 발견한 커피의 이야기

쌀쌀하고 스산한 잿빛의 겨울은 커피의 매력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커피는 언제, 어떻게 인류에게 소개되었을까,
커피의 기원에는 많은 전설이 있지만 커피가 언제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전 세계적으로 재배 된 커피는 수세기 전 A.D 850 년경, 이디오피아 고원의 고대 그 곳의 염소 양치기 칼디 (Kaldi) 가 신기한 커피 콩의 잠재력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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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오피아 지역에서 자연 가공 된 커피를 손 으로 선별하는 모습

이 이야기는 소년 칼디가 특정나무의 열매를 먹은 그의 염소들이 너무도 활기에 넘쳐 밤에 휴식을 취하지 않고 깨어 있는 성향을 알게 된 후 커피를 발견하고 커피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칼디는 자신의 발견을 지역 수도원의 수도 원장에게 전하고 수도원의 저녁 기도에도 활력을 주는 커피 열매에 대한 지식이 점점 퍼지며 공유하게 되고 점차적 동쪽으로 이동하여 커피가 아라비아 반도에 도달하며 커피 콩이 전 세계로 전달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커피 콩에서 발견되는 천연 알칼로이드 자극제인 카페인은 선천적인 식물 살충제 역할을 하며 커피 열매를 곤충으로 부터 보호하는 강렬한 열매이다.
커피 나무는 13세기 에티오피아에서 홍해를 가로 질러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으로 가져왔고 이슬람인 들은 커피를 종교적으로 마시게 되었으며 이슬람의 술 금지는 커피의 확산으로 촉진되었다.
커피 재배와 무역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되어 15세기 아라비아 예멘 지역에서 커피가 재배되었고 16세기에는 페르시아, 이집트, 시리아, 터키 등 여러 중동 국가에 커피가 알려지며 17세기에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중동 지방을 여행 한 유럽인들은 특이한 검은 색 음료에 대해 의심과 두려움으로 "사탄의 발명품"이라는 표현했으며 1615년 베니스에 커피가 전해 졌을때 성직자들은 커피를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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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 식물

커피의 사회적 논쟁이 너무 커 결국 클레멘스 8세 교황이 개입하게 되고 논쟁의 판결을 내리기 전 커피의 맛 을 본 교황은 커피의 맛에 반하여 그 후로 커피는 이태리 교황의 정식 승인을 받게 되며 급속도로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유럽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커피하우스는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빠르게 사회활동 및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영국에서는 "페니 대학"이 생겨 페니 값의 커피 한잔으로 다양한 종류의 만남과 대화의 장을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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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커피는 당시 일반적으로 즐기던 아침 음료 맥주와 와인을 대처하여, 술 대신 커피를 마시고 하루의 활력과 일의 생산력을 증가 시켰다. 이것이 현대 오피스 커피서비스의 선구자라고 생각할 수있으며, 오늘 날 지구 인구의 대 다수가 커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하루 일과 중 빼 좋을 수 없는 필수품으로 빠르게 전파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에 많은 기업들이 전문적인 커피 사업에 큰 몫을 차지하는 현실이다.

루이 14세 이 후 프랑스 커피

많은 커피가 역사를 의미하는 반면, 과거와 현재는 혁신과 혁명에 의해 형성되었다.
18세기에 일어난 혁명도 시민들은 카페에 모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논쟁을 벌이고 집회를 열었다,역사를 통틀어 커피는 변화의 원동력이자 프랑스 전통의 상징이며, 파리의 커피 이야기는 식민주의, 전쟁, 노동 계급, 부르주아 여성, 프랑스 궁정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처음 커피는 1644년 남 프랑스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했지만 일반 대중에겐 알려 지지 않고 대부분 프랑스 엘리트 들이 약용으로 사용하였고, 그 후 1670년 오스만 술탄 메스 메드 4세가 프랑스 루이 14세 왕 방문을 계기로 "투르쿠마니아"의 물결이 유행하게 되었다.
투르쿠마니아 패션들은 곧 파리 거리로 흘러 나오고 새로운 패션의 계기가 되고, 파리에 커피하우스도 생기게 되었다.
1686년 이태리 태생의 프란체스코 프로코는 향신료, 얼음, 레모네이드, 커피를 팔 수 있는 왕실 허가를 받아 고객이 도자기 컵에 음료를 마실 수있는 'Cafe Procope' 을 파리 6구에 개장하며 파리에 커피를 확고하게 알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유명한 배우,작가, 극작가 및 음악가 등 저명한 고객을 유치하고 파리의 사교를 중심으로하는 매력 있는 곳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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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사교계의 중심지 였던 카페 프로콥 1743 년

카페의 출현으로 파리지앵의 영감과 혁명이 구상되고 논쟁이 시작되는 장소로 확대되고, 카페는 인간의 기질을 바꾼 길조 혁명으로 묘사 되며 당시 파리 시내 카페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세련된 취향의 매력을 부여하고 높은 지위의 고객을 유치하며 사회의 계급이 더 만들어지게 되어 서민적인 영국의 카페와는 크게 대조되며, 파리의 카페는 확실히 민주적인 시설과 거리가 멀다는 우려도 나왔다.

1800년과 1차 세계대전 사이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이 프랑스 커피의 품질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프랑스 양국 간의 지속적인 전쟁의 일환으로 1806 년 영국은 프랑스 해군의 남은 식민지로의 해상 경로를 차단하여 설탕과 커피 농장에 대한 접근을 박탈했다.
이어 나폴레옹은 "우리 스스로가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것이다! " 라고 선포하고 두 가지 주요 농업 혁신을 개발하여 쓴 식물에 대한 연구와 맛을 키웠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비트의 뿌리로 만든 설탕,
그리고 계속해서 치커리와 커피를 로스팅하고 섞었다.


프렌치 언어가 된 카페

프렌치 커피는 20세기 동안 시장의 큰 변화를 가져 오기도 했다.
세기 초 산업화와 대량 소비의 도래로 전국의 소규모 가내 수공업이 감소하고 상당히 저렴하고 품질이 낮은 커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대채되었다. 그 후 1차 2차 세계대전은 인스턴트 커피의 발명과 대중화에 따라 값 싼 상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커피의 품질을 떨어뜨긴 후, 전쟁에 수반된 금융위기로 인해 프랑스는 아프리카 식민지에 병충해에 강한 인스턴트 커피의 주원료인 카네포라 종 로부스타 커피를 심게 되고 1960년 까지 프랑스에서 소비되는 커피의 75%는 로부스타였다.
18세기 말 까지 커피는 가장 수익성이 높은 수출 작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원유 다음으로 커피는 가장 많이 소비되는 식품이다.
그 후 수십 년동안 프랑스의 상품 커피 시장은 대 규모 국제적인 상표에 의해 상품화 되었으며 요즘 국내 시장은 '네스프레소'에 의해 장악 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단순한 음료로 커피를 마시는 의미가 아닌 장소의 의미를 두는 문화적인 장소로 카페 Café 를 중요시 여긴다, 아침 일찍 부터 일찍 문을 연 카페테리아에는 작은 커피 잔의 에스프레소, 뜨거운 우유를 섞은 카페 오레를 마시는 파리지앵의 단순한 수다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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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거리를 거닐다 커피 한잔과 함께 멋진 카페에 앉아 사랑의 도시를 감상하며,
수 많은 작가, 화가, 예술가들이 사랑한 이 마법의 도시의 매력은 결코 잠들지 않으리라 생각해 본다.
과거의 역사에도 선명히 존재하는 진한 커피는 프랑스의 영원한 혁명의 선구자로 미래의 창의적
도구로, 오늘은 우리 곁에 은은한 향기로 존재하고 있음에 행복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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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로저널 에이미리 기자
eurojournal25@e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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