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의 예술 칼럼 (266)
차이와 반복, 그리고 존재
모든 것은 영원회귀 안의 반복을 한다. 그 속에서 차이의 고유한 역량이 나타난다.
Anselm Kiefer, Starfall, 1995
칠흙같은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메말라서 쩍쩍 갈라져있는 땅 바닥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다. 이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낳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화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이다.
고대 후기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별은 하늘에서 모든 순간의 자신을 새기고 있는 글자와 같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제 각각의 흔적들로 가득차 있다. 모든 것들은 서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그래서 함께 같이 숨을 쉰다.
키퍼는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 과거사와 현대사에서 논쟁적인 주제들을 주로 다뤄오고 있다.
Anselm Kiefer, Velimir Chlebnikov, 2004
30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이 거대한 크기의 작품처럼 둔하고 무기력한, 거의 억압적이며 파괴적인 스타일로서, 그는 주로 대형 작품들을 많이 생산한다.
Anselm Kiefer, Narrow are the Vessels, 2002
흙이나 콘크리트, 철, 납 등 기타 무가공 재료들이 종종 혼합되어 사용되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람, 전설적 인물 또는 장소들의 서명이나 이름들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차이는 오직 자신의 역량 끝에서만, 다시 말해서 영원회귀 안의 반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되찾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안젤름 키퍼는 작품을 통해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 우연한 것, 다양한 것, 그리고 생성 등을 모두 긍정하면서 영원회귀 안에서 반복을 한다.
그래서, 재현의 전제들에 해당하는 같은 것과 유사한 것, 유비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을 배제하는 영원회귀 안에서 오직 자신이 생산하는 것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
'인간 욕구 욕망(Human/Need/Desire)' 1983.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미국 미술가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 1941-)은 1960년대 중반 비디오 카메라가 상용화되면서 적극적으로 비디오를 작품에 활용하기 시작한 미술가다.
그는 특히 작업과정을 소재로 한 프로세스 아트 작가로 불리면서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초기 비디오아트 예술가라고 평가되고 있다.
1964년부터 조각, 비디오,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68년 뉴욕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서 네온 사인 조각을 전시하면서 신체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주로 조각과 비디오를 동시에 이용해 작업을 하면서 작품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담아 내고 있다.
Bruce Nauman, WALK WITH CONTRAPPOSTO, 1968
1968년 이 영상 속에서는 한 남자가 골반을 앞,뒤로 흔들며 좁은 복도를 따라 힘겹게 걷고 있다. 그의 모습은 기괴하고 아주 불편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는 자그마치10분동안 이렇게 계속 걷는다. 다른 말도 글도 소리도 없다. 그래서 내용도 의미도 없어 보인다.
이 작품 속 좁은 벽은 고전 조각의 전통적 한계에 대한 과장을 담고 있다고 평가되는, 한 쪽이 막혀 있고 폭이 50cm인 한 구조물이다.
영원회귀 속 기쁨을 위해서는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들은 먼저 서로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브루스 나우만의 영상 속 남자는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다.
Bruce Nauman, Live-Taped Video Corridor, 1970
1970년대 초, 브루스 나우만은 좁은 복도 끝에 두개의 모니터를 설치해 두고 입구에서 그 쪽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길고 좁은 복도 끝 모니터를 향해 앞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위의 모니터에서 어떤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모니터로 다가가면 갈 수록 그 화면속의 사람이 결국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화면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반면, 아래 화면은 똑같은 텅 빈 복도를 미리 촬영해 그것만을 보여준다. 결국 관람자들은 방향 감각을 희미하게 잃어가고 불안한 자기 의식을 느끼게 된다.
Bruce Nauman, Green Light Corridor, 1971
이 작품 속 개방형 복도는 녹색의 형광조명 빛으로 물들여져 있다. 이것은 폭이 매우 좁아서 간신히 몸을 옆으로 틀어서만 드나들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색깔과 크기는 모두 작가가 불안감을 유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세계에 살고 있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모두 무의식의 세계에 있다. 그런데, 이 무의식의 존재들 속에서 의식적인 존재들은 정말 아주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성이 현실성을 가지는 강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술속에서 잘 드러내는 이 잠재성이 얼마나 발휘되었느냐에 따라서 존재는 다른 존재와 차이를 생성한다. 이러한 차이가 반복될 때 주체는 계속해서 ‘되기’를 한다.
우리가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이렇게 ‘되기’를 지속하고 있다. 차이가 반복되어서 주체가 되어지는 과정이 바로 이것이다.
위의 브루스 나우만의 두 영상속에서 관람자의 몸은 존재이다. 그리고 작품의 복도도 존재이다. 이 존재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주체로서 모두 ‘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최지혜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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