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우와 함께하는 와인여행 (41)
늦가을, 잿빛 하늘에 건배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신동엽 시인의 먹구름낀 하늘을, 만추의 쓸쓸함이 감도는 11월 끝자락, '디종'의 잿빛 하늘아래서 조용히 읊조려 본다.
이 시의 하늘을 꼭 빼어 닮은 한 잔의 와인과, 몇 폭의 그림들이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간다.
코로나 재 확산때문에, 집 반경 1km이내로 다시 이동 제한 명령이 떨어진 지금의 상황속에서는 꽤나 꿈같은 이야기지만, 오래 전, 가을 바다가 보고 싶어 훌쩍 떠났던 도빌(Deauville), 그곳에서 바라본 가을 회색빛 하늘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왜일까?
쓸쓸한 파도 소리 , 여름 피서객들의 왁자지껄한 분주함이 꿈결처럼 사라져버린 가을 바다.
유명한 프랑스 고전 영화 "남과 여 "의 배경이기도 했던, 그 바닷가.
색색의 파라솔은, 무대 위에서 화려한 군무를 추다가 갑자기 정지해 버린 무용수처럼 침묵속에 날개를 접고 서 있었다.
도빌 바닷가의 파라솔ㆍ사진 서연우
저녁 어스름이 깃들고, 바닷가 식당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질 때.
추운 몸을 녹이려 버터와 마늘, 파슬리로 맛을 낸 김이 모락모락 나던 홍합과 함께한 그때 그 백포도주 한 잔 !
아하, 그렇구나.
아마도 그 하늘이 생생한 것은, 그때 그 와인 때문이구나!
그때 찬바람 부는 가을 바닷가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함이 감돌던, 한 식당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은, 보르도의 소비뇽블랑, 부르고뉴의 샤르도네같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언급되는 품종과 지역에서 온 와인은 아니었고, 옛 성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낭트와 가까운, 루아르(Loire)계곡에서 온것이었다.
산도가 튀지 않으면서, 은은하고 안정감 있게 ,바다냄새 가득 품은 홍합의 볼륨 있는 담백한 맛을 잘 받쳐 주었던 그 와인은 도빌의 저녁 바다, 그곳에 걸쳐진 가을 하늘의 '차분한 고요'를 닮았다.
도빌의 바닷가 풍경ㆍ사진 서연우
영화제(도빌 미국 영화제: Festival du cinéma américain de Deauville)가 진행되고 있었던 그 곳에서 그 화이트 와인은, 화려한 주연 배우가 아닌, 결코 나서지 않으며 뒤에서 묵묵히 주연 배우를 잘 받쳐주는 훌륭한 조연 배우같은 그런 와인으로 기억된다.
와인 에티켓에 쓰여진, 포도춤종과 와인 이름, 원산지 명칭(Appellation)을 동시에 칭하는 '뮈스카데'(Muscadet)'라는 단어, 그리고, '효모의 찌게미와 함께 숙성했다'라는 의미의 '엘르바쥐 쉬흐 리' (élevage sur lies) 라는 단어를 또렷이 기억한다.
엘르바쥐 쉬흐 리 ㆍ사진 서연우
아하, 그렇구나.
산미를 생명으로 하는 화이트와인에서 금세 침이 가득 고이듯 쨍쨍한 산도와 같은 원색의 강렬한 느낌보다는, 다소 가라앉은 파스텔 톤과, 왠지 모를 아련함을 주는 세피아 톤의 경계를 오가는듯 했던 그 느낌은 '와인의 숙성 방식'에서 온 것이로구나. 에티켓을 훑어보고 내린 결론이다.
루아르 강의 하류쪽에서 특별히 믈롱 드 부르고뉴(Melon de Borgogne)라고 많이 부르는 이 포도의 단점을 굳이 찾자면, 산화(Oxydation )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산화 방지는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작업중 너무도 중요하다. 적포도주에서 타닌과 색, 향을 추출해내는 과정이 중요하듯, 백포도주는 신선한 산도유지가 생명과도 같다. 청포도 수확후 바로 신선한 온도에서 압착하지 않고,오랜 시간 포도를 방치하게되면, 너무 농익어서 물러진 사과의 풍미가 올라오고, 심한경우 박테리아의 번식으로 인한(박테리 아세틱 : Bactérie acétique) 식초의 향이 발산된다. 그보다 훨씬더 관리가 안될때, 알콜 성분인 에탄올과 아세트산이 결합하여 훨씬 더 역겨운, 매니큐어를 지울때 쓰는 아세톤같은 냄새(아세타트데틸 : acétate d'éthyle)가 나기도 한다.
그때 그 곳, 와인의 포도 품종은, 미역, 다시마같은 해초류등에서 많이 발현되는 요오드의 풍미(iodé)가 느껴지는 특징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이 포도의 레몬 뉘앙스와 향신료가 가미된 옅은 꽃향기가 난다는 이 포도의 장점에 마스크를 씌워 버릴 수도 있으므로, 이런 포도 품종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와인 만드는 과정에서 적절한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포도 품종 자체의 단점을 살짝 가리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말이다. 인간의 선택에 의한 와인 제조법은 이래서 중요하다.
백포도주를 만들때, 효모의 찌게미와 함께 숙성했다( élevage sur lies)함은 어떤 의미일까? 와인의 알콜발효를 주관하는 효모, 그 벽은 마노프로테인(manoprotein)이라는 단백질을 포함해 다당류를 배출한다. 이 효모 벽에서 나온 단백질과 다당류는 발효된 혹은 알콜 발효가 일시적으로 멈춘 청포도즙에서 생생하게 향을 내는 노골적인 휘발성분을 일부는 차단 시키기도 하고, 일부는 약화 시키기도 한다. 그 결과, 주석산과 단백질이 안정적으로 공존하며, 표현되는 포도주의 맛은, 산미가 날카롭게 튀지않고, 모난부분이 깎여 둥글둥글 부담스럽지 않은 산미를 가진 깊은 맛의 백포도주로 다시 태어나게된다. 날카로운 산미란, 생각만해도 입에 침을 가득 고이게 만드는 신맛의 레몬을 떠올리면 쉬울듯하고, 튀지않는 은은한 산미란, 헤이즐넛, 약간의 버터 풍미가 가미된 딸기나 복숭아향미같이 알데히드나 락톤(우유같은 뉘앙스를 주는 성분)에서 느껴지는 몽롱한 여운을 띈 산미를 생각하면 될것이다.
도빌ㆍ트루빌의 풍경 ㆍ사진 서연우
카지노가 있고, 파리랑 멀지 않은 도빌은, 예로부터 파리사람들의 여름 피서 장소로 각광 받았던 휴양 도시로 유명하다. 해마다 가을에 이곳에서 열리는 '미국 영화제(Deauville american film festival)'의 마지막 날 이었던 탓인지, 잘차려입은 남녀들이 넉넉한 은쟁반 가득 칵테일 소스, 레몬등과 함께 풍성한 해산물 모둠요리( 쁠라또 드 프뤼 드 메흐: Plateau de fruits de mer)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있었다. 미네랄 뉘앙스가 돌면서 산미가 짱짱한 샤블리, 소리또한 경쾌한 샴페인을 곁들여서 그런 탓일까? 파도 소리의 리듬에 맞춰 한 톤이 높아진 낭랑한 목소리로 그들은 박자를 맞추듯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간다.
도빌이라는 도시를 사랑했고, 도빌로 돌아와 도빌의 하늘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했던, 으젠느 부댕(Eugène Boudin)은 빛에따라 사물이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작품을 남긴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다. 주로 풍경화, 그 중에서도 드넓은 하늘의 이미지를 주로 그렸기 때문에, 같은 동료 화가인 '카미유 코로'는 그를 '하늘의 왕'이라 불렀으며, 회색빛 하늘같이 우울한 감성으로 시를썼던 보들레르에게 찬사를 받는 화가 였다고 전한다. 부댕이 그린 회색빛 구름낀 하늘은 효모 찌꺼기에서 숙성중인 우윳빛 화이트 와인을 닮았다.
보르도 미술관에 있는 부댕의 작품 ㆍ사진 서연우
보르도에 살던 시절, 바람불고 비내릴때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 자주 가던 카푸상 시장 안의 따끈한 홍합집 쥔장도 항상 « 효모찌꺼기에 숙성시킨 이 뮈스카데 »를 권하곤 하였다.
도빌에서
와인을 마시고,
바닷가를 걸으며
그때 그 모래 위에 남긴 발자국.
옛 시인이 읊었듯
« 삶은, 서서히
소리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갈라놓고,
파도는 모래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운다. !»
Mais la vie sépare ceux qui s'aiment.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Les pas des amants désunis
- 자끄 프레베르, 죽은 잎들-
흐린 기억속에 회색빛 늦가을
그 하늘을 닮은
은은한 삶의 배경같던
여우조연상을 주고싶었던
도빌, 그 하늘아래
그때 그 와인 !
서연우
유로저널 와인 칼럼니스트
메일 : eloquent7272@gmail.com
대한민국 항공사. 항공 승무원 경력17년 8개월 .
이후 도불 ,프랑스 보르도에서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 취득후
와인 시음 공부ㆍ미국 크루즈 소믈리에로 근무.
현재 프랑스에 거주중.
여행과 미술을 좋아하며, 와인 미각을 시각화하여 대중에게 쉽게 전달할수있는 방법을 고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