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을 노닐며
나는 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느 산사에 매달린 쇠 북을 보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또는 교회 첨탑의 닭 한 마리를 보면서도 하루를 즐거이 보낼 수도 있다.
옛 성황당 길목에 걸 터 앉은 들 무슨 대수랴.
깊은 사유思惟는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성찰의 시작이다.
오늘은 강변을 거닐며 강물사랑에 빠져 보기로 한다.
마인 강 가까운 소 도시로 이사 온 탓에 앞으로는 강물과 친구가 될 것 같다.
몇 달 전부터 나는 가곡 {내 맘의 강물} 이 바짝 당겨 유튜브 상 성악가들 합창단들의 공연을 거의 즐겼다.
그런 즈음 마인 강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 왔으니 가끔 헛헛한 웃음을 날린다.
나의 독일 첫 거주지 거리명과 이사 온 집의 거리명이 똑같다.
Fichtel 산맥과 Fraenkischen alb에서 발원한 Main 강은 장장 527Km을 흘러 마인츠에서 라인Rhein 강을 만난다. 바다가 푸르다면 강은 은빛으로 흐른다.
무수한 물결이 햇빛에 반사되고 바람에 일렁이며 은빛을 발산한다. 물고기의 비늘 같은 물결이 쉼없이 일어난다. 바다를 그리며 밤낮을 흐르는 강물은 인류의 젖줄이다.
모든 문명과 역사는 강 유역을 따라 시작되었다. 강변주변의 풍경은 사뭇 다양하여 뭇 사람들의 산책코스로는 딱이다. 강 섶 은 편안하고 아늑하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야기/설레 이는 내 가슴의 까닭은 무엇/구름 걷힌 하늘 아래 고요한 라인 강/저녁 놀에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로렐라이를 꼭 보고싶다는 지인의 요청에 한 밤에 오르기도 했다.
가는 내내 로렐라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인 강을 보면서도 내 고향의 낙동강과도 겹칠 게 많은 느낌이 있으리니.
측량기술의 발달로 7,062Km의 아마존 강이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강은 2위. 장강이 3 위이다.
양자강은 장강의 일부이다. 한때 세계 1위였던 미시시피강은 4위에 그쳤다.
한반도에서는 803Km의 압록강을 위시하여 두만강 낙동강 한강 대동강 금강 섬진강 청천강 예성강 영산강 순위이다.
한국의 4대강은 수도권의 한강 영남권의 낙동강 충청권의 금강 호남권의 영산강이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을 등줄기로 하여 쇠 갈비 짝 같은 지형의 특성상 큰 하천들은 남서방향으로 흐른다.
빗물 지표수로 물길을 이뤄 흐르는 규모에 따라 작으면 천이요 크면 강이다.
천은 내라고도 불리우며 통칭 물길을 하천이라 한다. 지표수가 흐르는 물보다 양이 엄청나다.
일본은 강江이란 용어 대신 천川을 고집한다.
육지는 바다의 총 면적의 1/5 도 못된다. 지구표면의 2/3 이상이 바다이다.
태평양 크기는 달을 따다가 담글 정도이다.
바다가 얼마나 큰 가 쉽게 비유한다면 ㅡ 장거리 대형 여객기의 순항고도는 대체로 1만 m이다. 이 여객기가 어느 지점 1 만 m 상공에서 지구를 한바퀴 돌아 출발한 원점으로 되돌아 올때까지의 지표 면과의 공간이 바닷물이다.
꿈이 큰 사람이 바다농사를 잘 지으면 세상사람들 양식걱정은 지구가 다 할 때까지 걱정 없겠다.
치산치수란 산과 하천을 관리해서 가뭄 홍수 산사태를 방지하고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다.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얼굴을 고치고 발복하기 위해 이름도 고치는데 자연환경과 기후변화에 대비하여 치산치수이다.
지구도 사람과 같이 돌아야지 제 혼자 가면 괘가 깨어진다.
태초의 자연이 오늘날의 자연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장담할 수 없다.
수에즈 운하 파나마운하는 운영하는 나라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톡톡히 하며 세계해상무역발전에 큰 이바지를 한다.
라인강을 운하로 이용하는 나라는 선진국이요 물길을 그냥 흘러 보내는 나라는 아직도 후진국이다.
저지대의 배수를 위해 총 7,000Km의 운하를 파고 간척으로 땅을 일군 네덜란드의 국명은 낮은 땅이란 뜻인데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다.
한국은 연안개발 항만 공사 등으로 형성된 인공해안의 길이가 5,086km에 달한다.
여름에는 집중호우로 인해 홍수가 나고 가뭄에는 하상을 들어내는 하천이 많았는데 점차적으로 강 주변을 정리하여 재해를 방지하다가 4대강 개발로 그런 사례가 완연히 줄어졌다.
향후 물 부족국가군에 속한 한국에서 4대강 개발의 당위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4 대강의 녹조현상은 생활폐수 공장의 중금속폐수 농사일에서 나오는 화학비료 농약 가축들의 분뇨 행인들의 쓰레기 방기 등등 많은 양들이 보湺로 흘러 들어간 탓이 아닐까 여겨진다.
막아 놓은 물을 관리 하지 않으면 오염수로 변질된다. 식수원이나 보의 물은 가둬 둔 물인데 수질의 차이는 왜 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강물은 공업 농업 생활 관개 수력발전 수상운수를 도 맡는다. 흐른다는 것은 자기 앞을 채우고 나아간다.
물은 그릇 모양대로 따른다. 물의 심성은 착해 생명수이다.
오는 강물 보기와 흘러간 강물보기는 달리는 열차 칸에서 앉은 위치에 따라 바깥을 보는 기분과 흡사하다.
오는 강물은 뭔가를 이끌어 내야하는 강박관념이 생기고 흘러간 강물은 뭔가를 정리하고 매듭지어야 하는 마음이 든다.
시냇물은 졸 졸 졸 물고기는 왔다갔다하는 졸 졸 흐르는 물 소리는 물 바닥의 상태에 따른다.
물 바닥의 돌멩이 크기 놓인 간격 물 길 폭에 따라 물소리가 정해진다. 물길 폭이 넓고 물이 많이 흐르면 여울이나 가끔 생기지 물소리는 덜 난다.
물소리가 둔탁하면 바닥이 고르지 않다. 지구의 자기장 볼텍스 Voltex가 가장 많이 응집된 미국의 세도나에는 Slide rock이라는 물 미끄럼이 물놀이 재미를 더 해준다.
하천의 바닥 바윗돌들이 낮게 경사를 이루며 동그랗게 닳고닳아 미끄럼 역할을 한다.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지면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좌우로 몸이 흔들거리며 마냥 내려가기만 한다.
어릴 때에는 아무래도 한 여름 물놀이가 즐겁다. 개헤엄을 치며 일정 구간을 오간다.
수영 실력이 있는 아이들은 다리 기둥 아래 움푹 들어간 지점까지 잠수하고 저쪽에서 올라온다. 나는 수영을 잘못하여 저 아이들을 보면 나중에 물 귀신도 잡겠다 무서움증이 돌 곤했다.
자리를 털고 하늬바람을 맞으며 마인강을 따라간다. 물 길 따라 내닫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강 물처럼 맑다. 제 신명에 지치다가 또다시 조잘거린다. 아이들의 빰은 새악시 볼처럼 발그스름해져 얼굴 색이 곱다.
하롱하롱 떨어진 꽃잎들은 바람결에 날려와 저마다 꽃잎 배가 된다. 조용히 밀려난 잔잔한 강물 속을 물끄러미 들여 다 본다. 앗, 내가 웃는다. 계속 마주보니 싱겁기도 하다.
언뜻 흔들리게 비치는 추억이 떠 오른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고 떠나 보낸 옛 사랑이 어른거린다.
그날은 교교한 달빛이 강물처럼 흐르는 봄날이었다.
서울 가는 중앙선 밤 열차에 마주앉은 산골 처녀의 애환을 듣고 전차 표 값만 떼고 돈을 쥐여주던 생각이 홀연히 떠오른다.
그녀의 가녀린 손길이 떨려 가슴이 저미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게 뭘 까 첫사랑이 퀴즈를 냈다. 아님 말고 식 퀴즈이겠지 하고 나름 궁리를 했지만 촉이 안 잡혔다. 이럴 때 에베레스트산이라 하면 고지식하다. 그건 지아비 란다.
하늘 천天을 뚫고 솟은 지아비 부夫가 아니냐는 거다. 어쭈, 그렇다면 나중에 잘되면 날 극진히 보살펴 주겠네 뜬 기분이 방방거렸다.
해가 넘어갈 즈음 내 그림자가 길어진다. 내 어디에서 무거운 슬픔을 지니고 왔는지 오늘따라 그림자가 길다.
불효한 자식의 큰 멍에일지 모른다. 굽이치는 강 줄기에서 시선은 끊어지고 하늘을 쳐다본다.
바람에 빗겨간 엷은 구름장들이 솜 사탕 같다. 멀리 떠나보내면 그리움이 생긴다. 그리움은 채울 수 없어 더 그립다. 강물은 가고 오지 못한다.
인간사 또한 그러하니 수 시로 강을 찾아 지난날을 반추하며 하나씩 줄여가겠다.
욕심이 무거우면 몸이 시달려 병을 부른다. 강기슭 한 켠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은 오붓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저 강물은 떠나는 이 만나는 이 헤어지는 이를 보았고 그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고향의 강물은 조상님 제사상을 차리는 분주한 모습도 지나쳤을 게다. 저 강물은 흐르고 흐르면서 많은 것을 듣고 보아 뜻있는 이들에게 뭔가 알려줄 것 같다.
나는 거기에서 무언가를 듣고 깨치는 바가 있어 한 줄기 업을 잡아가겠다.
영특하게 자라는 손자가 기특한 것이 하나를 배우면 응용할 줄 안다. 탁구를 한 시간 배우더니 벌써 똑딱 볼을 친다.
얼마간의 마술을 할 줄 알아 학교에서 인기 짱이다.
갓 초등학교 입학했거늘 나이에 비해 앞서가는 게 많다.
내 욕심 비운자리의 삶의 여백에는 손자 사랑으로 채워가겠다.
사람이 죽지 않거나 엄청 오래 산다면 세상살이에 큰 재앙거리가 넘쳐나겠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겠다.
마구잡이 세상이라 지옥보다 사는 게 더 끔찍해지니 험한 꼴 안 보고 어느 정도 사는게 자연의 섭리 아닐까?
고로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한 것이다.
오늘은 누구에게는 아주 소중하고 오랫동안 기다린 날 일 진데 내가 오늘 별로 할 일없다고 빈둥거리면 시간에 대한 모욕이다.
누구나 한 세상 잘못됨 없이 착실하게 살려 노력한다.
이는 자식들을 위한 길 닦이다. 이로 하여 한 세상 살아야 하지 않겠나?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2021년 5월 어느 날
강가에서 길을 묻다.
독일 한인동포 손병원님 기고문
Byung-Won Sohn woniker@web.de
위의 글은 유로저널 독자님의 독자 기고문으로서 내용이나 주장면에서
본 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 유로저널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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