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4부-2
3) 신체
니체는 우리 신체의 유한함에 대한 겸손한 표현으로 신체를 큰 이성(die große Vernunft)이라 했다. 니체는 육체 중심이든, 이성 중심이든간에 인간을 두 단위로 분리하여 해석하는 모든 해석을 형이상학적 인간관으로 규정하며, 이것을 인간에 대한 오해라고 단정했다.
이런 해석들을 극복하기 위한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신체’를 선택했다. 신체를 이원화할 수 없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명칭으로 이성(diegroße Vernunft), 나(Ich), 그리고 자기 자신(das Selbst)을 사용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니체에게 인간은 곧 신체였다. 신체는 역동적인 힘에의 의지에 의해 자아를 실천한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강렬한 사랑은 신체에서 출발하여 대지의 중력과 생성의 현기증을 감당하면서 사유한다고 니체는 강조했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각 기능이 감지하고 정신이 인식하는 대상들은 결코 그 안에 자신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감각기능과 정신은 너를 설득하여 저들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의 목적임을 믿도록 만들려 한다. 이처럼 허황된 것이 저들이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서 신체도 곧바로 그것이 가진 능력 또는 힘들과 동일시된다. 그는 신체를 따라 가면서 사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바깥에 있는 무엇, 바깥과 연결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게도 신체와 대지야말로 의식과 천국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질 들뢰즈
그는 모든 신체는 하나의 알 또는 괴물이며, 그것은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기관들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그러한 기관들 아래에서, 그런 기관들을 통해 여전히 작동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체들이며, 그것들은 극한의 지점에서 무한히 변신 가능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들뢰즈는 영국의 소설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D. H. 로렌스와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여겨지는 세잔을 참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잔,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9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그려지는 것, 그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 그것은 신체이다.”
들뢰즈의 회화론에서 신체와 감각은 구별 불가능하다. 신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하면서 동시에 감각되는 활동의 부피, 또는 그 사건의 장소이다. 또한 감각은 잠재성의 차이, 즉 내포적 강도의 포착이다.
그러므로 신체는 힘이 난입하는 지점, 또는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회화는 신체, 즉 힘을 그리는 것이었다.
4) 자신(Das Selbst)
니체는 자기(ego)에 의한 감각기능과 정신, 이 모든 것들은 한낱 도구에 불과하며 놀잇감에 불과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 뒤에는 자신(Das Selbst, self-essence)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감각의 눈을 도구로 하여 탐색하며 정신의 귀를 도구로 하여 경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Das Selbst)을 바로 사상과 생각과 느낌 배후에 있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우리의 신체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최고의 지혜”를 발휘하면서 자기(ego) 극복을 위한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힌두교의 성경이라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서는 자기 자신인 자아(self)를 빛을 발하는 아트만(atman)으로 묘사하며 이것의 깨달음을 신과의 합일이라고 설명한다.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신체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힘의 상승과 강화를 꾀하기 때문에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존재의 전 영역에서 수행되고 있는 힘 상승의 노력과 그것으로 인한 자기 극복의 역학이 진행되고 있는 되어가는 존재, 생성되고 있는 존재다.
“도대체 누가 해석하는가? 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해석 행위 스스로가 힘에의 의지의 한 형식으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존재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생성으로서, 충동으로서.”
산에서 10년 간의 고독한 명상생활을 한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에게 전해준 그의 첫 철학적 사유가 바로 위버멘쉬 사유였다. 여기서 위버멘쉬는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며,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한다.
니체는 제도 속의 신은 죽고, 오직 ‘자유분방한 춤을 추는 신’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 신을 인식하는 위버멘쉬의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의 영원회귀를 바랄 정도로 가치있고 의미있으며 필연적이다.
5) 자유정신(der freieGeist)
니체는 위버멘쉬적 인간을 자유정신(der freieGeist)의 소유자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정신이 자유정신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낙타(성실)→사자(용기) →아이(시작)의 단계로 묘사했다.
낙타처럼 성실하던 사람이 기존의 관습·규범·관계 등에 저항할 사자와 같은 용기를 갖게 된 후, 결국 다시 모든 것을 긍정하고 창조하는 아이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아이의 웃음에서 긍정을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 인간은 한 마리 사자다. 하지만 용과의 전투에서 사자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용에게 ‘나는 싫다’고 반항했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그는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않았다.
결국 사자는 천진난만하고, 망각하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자, 최초의 운동인,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선항 긍정 그 자체인 어린아이로 다시 되돌아간다.
조셉 캠벨 '영웅의 여정'
이와 같은 과정을 신화 학자 조셉 캠벨은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의 여정으로 설명했다.
차라투스트라는 궁극적으로 원하는 아이의 자유정신의 상태를 새의 상태 혹은 춤추는 자로 비유하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창조를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반대로 실패한 자유정신을 그림자로 빗대며,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자로서 여러 다른 사상들에 부딪히면서 결국 허무주의자가 되는 운명을 지닌 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림자가 가장 짧은 정오를 완전한 세계을 긍정하고 경험하는 인간적 행복의 극치의 시간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
페르시아 현자의 부활을 통해 니체는 궁극적으로 자기극복의 고통과 기쁨을 갖는, 자유 정신과 육체와의 통일체인 건강한 미래의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 미래의 인간은 현재를 인식하고, 삶에 대해 무한히 긍정적이다.
이런 미래의 인간에 대한 약속을 하면서 니체는 이 책을 “제5의 복음서” 혹은 “미래의 성서”라고 불렀다.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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