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피를 두 손을 모으고” (최욱경2)
5. 소통하고 싶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공감하기를 바란다.” – 최욱경
최욱경
그는 남성 작가 중심으로 쓰여졌던 한국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여성 작가로서 한국 미술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떠한 가능성에 대한 열망의 증거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평가를 가능케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졸업 후, 1963년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미국 크랜브룩 미술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던 당시 그는 문화 충격으로 엄청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당시의 심정을 틈틈히 적은 시로 이후 ‘낯설은 얼굴들처럼’ 이라는 영문 시집을 펴내기도 했는데, 이것은 1972년 국내에서도 출판되었다. 또한 캐나다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인적도 끊어진 도보엔 달빛만이 하얗고
나 홀로 여기 이렇게 유배되어
흐르는 피를 두 손을 모으고
“향수” – 최욱경
당시 그의 유학 시절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심작케하는 시 중 하나다.
1965년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번에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눈물 흘리며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보내 주는 돈으로 학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많은 미국 대학생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뉴욕 시절부터 계속 아르바이트를 찾았고, 학교식당과 선물 가게 점원, 포스터 찍는 일 등을 하면서 쉴틈없이 일했다.
그가 처음으로 가진 정식 직장은 정신박약아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원색적으로 표현되는 사람의 감정을 배울 수 있었다.
Choi Wook-kyung, Untitled, c.1970 (New Orleans Auction Galleries소장)
파랑, 노랑, 초록, 보라, 검정, 흰색 등이 파도의 물결처럼 출렁인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하지만, 거칠지도 않다. 부드럽게 넘실 넘실 흘러간다. 정신박약아 아이들의 순수한 정서처럼 인간의 때묻지 않은 감정이 물 흐르듯이 흐른다.
6. 맘껏 햇볕을 쬐고 싶다
“마치 내가 아파트에 심은 해바라기처럼 맘껏 숨쉬고 햇볕을 쬐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최욱경
그는 푸른 잔디를 맨발로 거닐고 싶어 석달간 시골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 도시생활에서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상자 속에 갇혀 살면서 그는 자유롭게 숨쉬고 햇살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최욱경
그래서 친척의 안락한 저택을 마다하고, 조그마한 마치 닭장 같은 데서 겨울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톱을 들고 산에 가서 나무를 자라 땔감을 만들고 캔버스도 직접 만들어서 작업했다. 그림을 그리다가 땔감이 떨어지면 다시 톱을 들고 산으로 가 나무를 벴다. 그는 자연에서 자신의 그림의 모든 것을 찾을려고 노력했다.
Choi Wook-kyung, Last Summer of Crane Village, 1980
여성의 몸의 곡선처럼 구버져 있는 짙은 브라운, 블루, 그린의 산들이 뭉실 뭉실 구름처럼 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흰색이 섞인 옅은 블루와 그린 색의 강이 잔잔한 물살을 일으키며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기뻐서인지 산들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띄워놓더니, 이번에는 하늘은 사랑스러운 핑크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7. 여자 특유의 개성을 살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최욱경은 자신의 20, 30대를 대형의 화폭 속에 자신을 불태워 뛰어들었던 시기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1960~70년대, 그는 필력과 신체의 힘이 느껴지는 추상표현주의를 자유롭게 거침없이 구사했다.
그의 내면의 경험을 순화하지 않고 에너지와 흥분을 그대로 표출하는 이런 방식을 두고 지나치게 미국적이다, 남성적이다라는 평가도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적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갖추는 것이 당시 예술가들이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1971년, 최욱경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몇 번의 전시회를 열었으나 이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겉돌았다.
그러다가 그는 1974년 캐나다에서의 전시를 이유로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애틀란타와 위스콘신 등에서 5년을 더 머물렀다.
1978년 한국으로 잠시 돌아와, ‘뉴멕시코의 인상’이라는 전시회를 서울, 부산, 대구에서 가졌을 뿐, 그는 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12 년이라는 미국생활에서 텅 빈 공허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조그만한 여자 대학교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의 교육과 그들의 숨겨진 재능을 찾는 일에 집중했다.
술과 담배를 즐겼던 그는 학창 시절 여자 답지않게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것을 내심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80년대 초부터 그는 여자 특유의 개성을 살리는 작업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Choi Wook Kyung, Fool's Game, 1980
여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 여자이기 때문에 느끼고 발생할 수 있는 표현, 이런 것들을 최대한 끌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추상표현주의란 신사조를 국내에 소개한 중견 여류 화가, 그리고 강렬한 색채와 커다란 스케일을 통해 절대조형을 확립한 대표적인 중견 여류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8. 괴짜 교수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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