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이 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던 말이다. 그 나름의 정치에 대한 정의(定義)이자 한국 정치현장에 대한 그의 소회일 것이다. 짐작컨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방향이 바뀌어 버리는 현실정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말은 학문 방법론에서 거론되는 우발적 인과관계나 사회 영역의 카오스적 현상, 또는 복잡성 이론을 모두 헤아려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또는 역사의 비결정적 경로에서 나타나는 변수간 상호종속성이나 복잡인과관계(complex causation) 등의 지식에 바탕을 두면서 이런 언급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위의 복잡한 등식에 대해 고민깨나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그리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사회적 행위의 복잡성이나 비결정성은 비단 국내정치적 영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제정치도 마찬가지다. 모든 국제정치 현상이 처음부터 잘 짜인 각본에 의해 진행되거나 힘의 관계에 의해서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간 힘의 강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힘의 강약이나 힘의 배열관계(구조)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때에 따라 국가가 표현하는 의도나 행위 자체가 현상을 낳고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 언급한 “북한에 대한 많은 양보” 발언 때문에 한,미관계가 악화될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현시점 한국 외교에서 대미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를 위해 평택 미군기지 이전문제도 정해진 법률적 틀로써 접근하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아울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는 최악의 경우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 둘 수 있다는 전략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한국과 나눌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한 미국이 한국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존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최대 이슈는 북핵 문제다. 북핵 문제의 처리방향과 그 과정상의 외교적 방식이 향후 동북아 지역질서를 결정한다. 대화를 통한 해결이 어려워지고 국면이 경색된다면 지역질서는 대립으로 치닫는다. 반면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이슈를 다자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가능해진다면 동북아 안보질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설 수 있다. 다자안보협의체에 근거한 안보질서를 모색해 나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한국은 지금의 갑갑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켜 보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동북아 협력질서 창출이라는 외교적 수사(修辭)만은 아니다. 동북아에서 대립중심의 질서가 나타나게 되면 그 고통스러운 폭풍은 고스란히 한국에게 불어닥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것은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길을 잘 열어주면 저도 슬그머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것을 남북 정상회담 개최 희망과 관련된 직설적 화법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남북한에 허용된 협소한 공간 속에서 협력과 평화를 향한 작은 의도들을 표현함으로써 경색되어가는 북핵 문제를 타개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그 성과 위에서 한국 외교의 공간을 넓혀가는 기회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표현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은 6월 경의선을 통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가져갈 방북 보따리에 남북한 관계는 물론 한국 외교의 공간을 확대하고 활성화시킬 수 있는 해법이 담겨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것이 동북아 국제정치가 협력과 평화의 시대로 전환되는 물꼬를 틀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그의 어록도 다시 씌어져야 할 것이다.“외교 또한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고 말이다. 한국 외교가 생물처럼 생명력을 가진 외교 전선을 열어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