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는 ‘착각 속의 한국 정치’란 제목의 이런 글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착각-부자들을 못 살게 굴면 중산층 이하가 다 자기들 편이 되는 줄 안다. / 한나라당의 착각-잘 한 짓이 단 한 개라도 있어서 선거에 이긴 줄 안다. / 민주노동당의 착각-극단적인 구호만 외치면 서민들이 자기들 편이 되는 줄 안다. / 모든 정당의 공통된 착각-아직도 국민들이 바보인 줄 안다. / 국민들의 착각-언젠가는 정치인들이 착각에서 깨어날 줄 안다.”
인터넷상의 글은 재담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돈다는 것은 공감대가 그만큼 넓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5.31 지방선거 결과는 한국 정치에 보내는 국민들의 옐로카드였다. 그러나 정부도, 정당도 그런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데 국민들의 절망이 있다.
지난 5.31 지방선거는 한마디로 경제난을 해결 못하는 정부,여당의 무능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참담한 패배를 했음에도 정부,여당은 아직도 달라진 게 없다. 열린우리당은 말로는 ‘첫째도 서민경제, 둘째도 서민경제’라며 국민의 뜻을 알아차리는 듯 했지만 석 달이 가깝도록 국민 피부에 닿는 변화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싹쓸이 대승을 한 한나라당 역시 선거 승리에만 취해 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 지방 권력을 싹쓸이함으로써 이젠 한나라당도 나라 살림에 반쯤은 책임을 지게 됐다. 또 차기 집권을 자신하는 정당이라면 무능한 정부,여당을 대신해 국민 앞에 대안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전히 반사적 이익을 노려 정부,여당 헐뜯기에만 열중할 뿐 건설적 대안은 못 내 놓고 있다.
민주노동당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본거지에서도 참패한 직후 잠시 반성의 모임들을 가지며 새 출발을 하는가했더니 도로 아집과 폐쇄, 파벌의 낡은 껍질 속에 들어 앉아 꼼짝도 않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4일 발표된 CBS의 여론조사에서 민노당의 지지율은 6.2%로 뚝 떨어져 3위 자리를 민주당(8.6%)에 내 주었다. 실로 민노당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그래도 아무런 변화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들은 한 패가 되어 청와대 인사를 천하대세라도 되는 양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종내는 열린우리당이 그 정치 공세에 말려들어 청와대와 ‘권력투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지난 2주 동안 이 나라에는 FTA문제도, 수해복구문제도, 서민경제 회복문제도, 북한미사일 문제도 없었다.
사실 내 코가 석 자인 대부분의 국민들은 김병준 문제에도, 문재인 문제에도 큰 관심이 없다. 정부가, 각 정당이 하루 빨리 침체의 늪에 빠진 경제를 활성화해서 다시 희망을 주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릴 뿐이다. 각 정당과 언론은 국민의 절박한 요구와는 관계없는 인사문제로 사회를 소란하게 하는 몰염치한 짓을 더 이상 계속해선 안 된다. 각 정당이 다투어야 할 의제는 첫째도, 둘째도 경제활성화 문제이며 언론들도 국민의 관심을 거기에 모아가야 한다.
내년 봄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프랑스에서는 대선 예비주자들이 경쟁적으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한다. 잘 팔리고도 있다고 한다. 단순한 선전물이 아니라 주요 국가적 쟁점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정치철학을 담고 있어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은 프랑스 못지않게 많지만 국민 스스로 사 보고 싶은 저서를 낸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직접 쓰지는 못하더라도 앤소니 기든스를 동원했던 토니 블레어처럼 학자를 동원해 자신의 정치 철학과 포부를 체계화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여느 선거 때와는 달리 ‘민주화’가 아닌 ‘경제적 삶의 질’이 으뜸가는 쟁점이 되리라는 것이 확실해 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대선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내놓아야 할 것은 자신의 국가 경영철학이며 머리가 터지도록 다투어야 할 것은 상대의 약점이 아니라 수렁에 빠진 이 나라 경제의 활성화 대책이다.
‘언젠가는 정치인들이 착각에서 깨어나리라’ 믿는 순진한 국민을 바보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