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의 성립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민' 혹은 '국민'이라는 명칭을 태생적으로 안고 살아가게 했다. 동시에 입헌주의 국가 체제의 선언으로 인간은 '반드시' 정치성을 띠고 살아가게 되었다. 즉 국가의 침해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수많은 근대사상가들이 이런 원칙을 뒷받침할만한 구조를 고민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영국과 미국(혹은 유럽)을 대표로 하는 두 가지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입법과 사법, 부수적으로 행정의 권력분립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특히 사법을 제외한 기구들은 국민으로부터 그 권한을 부여 받기 때문에 당파성을 띨 수밖에 없다. 즉 갈등의 확산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사법부의 경우 그 갈등의 결과로 만들어진 법이 엄격히 적용될 수 있는가를 감시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갈등의 봉합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위법하거나 부당한 국가기관의 행위로부터 국민들을 사후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장치다. 법관들이 선출직이 아닌 이유도 바로 이런 전문성과 기술성,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을 그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측면은 그 대표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많은 독재자들에 의해 정치적 시녀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시대 조봉암 선생은 '빨갱이'라는 낙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3공화국과 유신을 거치면서 수많은 민주열사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사형언도와 거의 동시에 집행되어 목숨을 잃었다. 대법원을 최종심으로 하는 우리 사법 구조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구성원이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법의 저울추는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민주화 투쟁의 긴 터널을 거쳐 1987년의 개헌은 바로 이런 말로만 '중립'인 기구로부터 더 국민의 권익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 4 부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헌법재판소'다.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국가의 통치구조를 밝히는, 법률보다 상위의 헌법을 통해 자칫 억울한 사법적 잣대와 정치적 폭압으로부터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임기 6년의 헌법재판관들은 1기, 2기를 거치면서 실제 인권 옹호적인 판결들을 쏟아내었다. 그동안 고도의 정치성을 띠었다는 이유로 개입을 자제해 온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직접 사법적 판단을 내렸으며, 단지 판결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각 재판관들의 의견을 각각 공개함으로써 당대의 시대 정신이 어떠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선출직이 아니면서 정치적 판단을 한다는 본질적인 모순이 나타난 것이 바로 지금의 3기 헌법재판소다. 애당초 헌법은 모든 사항을 세세하게 규율하지 않는다. 추상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규범'만을 제시한 후 세부적인 해석과 규율은 다른 정치기구에 맡겨 버린다. 그렇기에 헌재의 판단은 바로 헌재의 인적 구성원의 성향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이 그들을 결정한다. 실제 이번 종부세 판결에서 9명의 재판관 중 8명이 종부세 대상자이며 그 중에서도 일부 조항에 위헌 판결을 내린 재판관들 7명이 상당한 금액의 종부세를 감면받게 되었다. 엄밀한 법률적 판단을 했다고 하지만 반대의견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법률적 판단 자체가 개인의 당파성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이번 3기 헌재는 이전의 헌재들이 '민주화의 당위'라는 거시적 사명 아래 활동한 것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자이툰 부대 파병과 같은 상당히 당파적인 정치적 이슈들을 다루었다. 특히 이번 종부세 판결에서는 강만수 재정경제부 장관의 접촉 발언으로 그 위상에 심각한 상처를 받음으로써 헌재의 정치기구화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야당들은 당장에라도 헌법재판소에 대한 국정조사를 벌일 태세다. 사실 지금까지 대다수의 '평균적' 국민들은 헌재 재판관들을 과거 '지혜의 올빼미'로 여기는 듯 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그들 역시 삶과 정치에 부대끼는 하나의 인간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저울과 칼이 아니라 밥숟갈과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제는 커밍아웃을 할 때가 되었다. 로스쿨 시행되는 김에 과감히 '사법'이란 '고도의 정치'이며 '계급적 당파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괜시리 에헴하며 중립인양 하는 것보다 삶의 진흙탕에 직접 부대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제 5 부를 만들어야 할까? 이래저래 '사법'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헌법재판소의 모습이 우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