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다. 역사가 되풀이 된다는 말은 단지 역사적 사실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았던 군상과 사회의 역동적인 과정이 다른 상황, 다른 인간들의 관계속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벌어진다는 데 있다. 그리고 2008년의 매서운 칼바람을 헤치고, 역사의 아픔이 반복되려고 한다. 책을 사르고, 학자들을 땅에 묻어버린 그 참혹한 비극이 말이다.
그 기억의 단초는 G20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이 던진 한 마디에 있다. 지난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대통령은 정진곤 교육과학문화수석을 질책하면서 "수정을 거부하고 있는 출판사의 입장은 뭔가 ? 출판사 쪽에서 '정부의 검인정 취소' 얘기가 나오는데 이럴 경우 정부가 모든 부담을 짊어지는 것 아니냐, 연구는 해봤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거기다 풍문으로는 "출판사가 정부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 아니냐"란 소리까지 나왔다고 한다. 민간이 정부를 두려워 하는 세상. 그건 이명박 대통령이 건설회사 사장 시절을 회상하며 그토록 비판하던 소리가 아닌가?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교양도 없을 뿐더러,오히려 권위주의 독재자나 할 법한 소리를 스스럼없이 내뱉는 '민주주의의 공적'일 수 있다.
게다가 교과서의 수정권은 전적으로 저자에게 있음에도, 정부는 출판사에 이런저런 위협을 해가며 수정을 '지시'하셨다.그러다 법적으로 불가능한 '직접 수정'이나 다름없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오자 엄연히 '지시'였다며 발뺌한다. 법치주의의 한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까지 자의적인 해석과 의도적인 협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들은 과연 국민의 성실한 봉사자인가,아니면 권위로 군림하는 통제자인가?
정권이 바뀌고 통치권력의 성향이 바뀌면 교과서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맞을까? 문제는 애시당초 교과서를 두고 '좌편향'이라며 규정지은 사람들에게 있다. 교과서는 한 시대의 보편성의 상징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 중에서 가장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항들에 대한 합의이다. 학계의 수많은 이설이 토론을 거치고 검증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그런 과정조차도, '국어'과목처럼 단 하나의 표준이 필요하지 않는 한, '검정'제도를 통해 다양한 종류로 출간하여 민간의 자율에 맡긴다. 그토록 비판하는 일본 후쇼사의 왜곡된 역사교과서마저 수많은 일본 역사교과서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현재의 역사교과서가 좌편향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만든 '우편향'교과서를 검인정 해주면 그만인 일이다. 그걸 두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며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기는 모습, '너무'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세력들이 늘상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자유주의'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 전 영역에서의 '시장자유주의화'일게다. 자유주의는 다원주의를 그 본질로 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개인의 창의와 능동적 창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자유로운 사상을 통해 창의와 새로운 영역으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대교협이 '대학자율화'를 외치며 '3불정책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으로 심오한(?) 뜻에 있다 하겠다. 그런데 중고교 과정에서부터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의를 억제하는 저 '교육기술과학부'의 높으신 양반들은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인재양성이란 시대적 과업조차도 지난 반 세기 지지부진했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제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정부가 손을 떼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할 정도다. 사교육이 70%를 차지하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을 보면 이래저래 씁쓸한 자조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시 교육청의 '우편향' 역사 특강에 대한 논란을 보고 있자면, 이미 변화한 시대를 보수라는 이름 아래 온 몸으로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들은 어쩌면 기술만을 우대하며, '문사철'을 단순히 일류대학 진학을 위한 점수화된 수단으로만 교육받으며 자랐던 피해자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수많은 갈등과 위기의 근본원인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역사는 분명히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정진곤 교육문화수석, 이번 교과서 수정을 밀어붙이는 행정부의 공무원들과 수장들, 정치인들의 이름 하나하나 모두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중국의 시황제가 '법가' 이외의 모든 유가사상가들과 그 책들을 지워버린 것이나, 연산군이 '무오사화'로 수많은 사관들을 죽여 없앰으로써 희대의 '폭군'으로 기억된 사실을 우리 모두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