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서거 이후의 역사적 과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공식적 의제로 설정되기까지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다.
권위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주로 통치권력 중심으로 의제가 설정되었고,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대중적 갈등의 심화로 인해 국가가 이를 조정해야할 체제의제로 받아들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당연히 후자가 옳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민중들의 요구가 의제화되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민주적 제도화와 인간적 삶의 보장, 평화적 통일이라는 의제가 충분히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강압이나 반공주의,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억압되기 일쑤였다.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 속에 사회적, 계층적 갈등 표출을 허락치 않았고, 이를 주장하는 이들을 '반체제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따라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제들은 정치사적으로 충격적인 계기가 있어야만 분출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고 김주열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이나, 전태일 열사 분신과 노동3권의 보장, 1980년의 광주민주화 운동과 87년 박종철 치사사건으로 불붙은 6.10 민주화 투쟁 등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의 또 한 장을 써나가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역시 잠재된 민중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민주적 과정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987년의 민주화는 군부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권위주의 정치를 소멸시켰다. 따라서 그 이후 사회 전 영역에서의 민주적 운영 원리가 설정되고 내재화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으며,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는 바로 이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 세력 역시 반독재 투쟁에는 익숙했으나 민주화 이후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명을 따르는데는 한계를 보였다. 3당 야합이나, 지역주의에 기반한 분열과 반목, 소모적인 정치 투쟁은 여전히 증오와 분노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마디로 민중의 의사를 수렴하여 표출하고 이를 정치적 논쟁의 장에서 해결할 역량이 민주화 이후 각 정당들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정치적 권한이 대통령에 집중된 우리 헌정체제의 특징에도 기인한다.
정치적 열망의 성취와 실패의 책임이 모두 지난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이유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 동안 민주적 과정의 내재화에 거의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했다.
지역주의 타파, 권한의 분산, 지방 분권 및 균형 발전, 민주적 국정 시스템의 구축과 시민 참여적 정치를 통한 전 사회적 효율성 강화가 바로 그가 설정한 과제였다. 그러나 충분한 정치적 지지세력이 부족했던 그에게 5년이란 기간은 너무 짧았다. 또 급격한 변화에 저항하는 수구 보수 세력과 언론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게다가 좌충우돌하는 그의 스타일 역시 온전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걸림돌이 되곤 했다. 진보 진영도 '좌측깜박이를 키고 우회전'하는 그에게 실망하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현 정부에 남겨진 숙제다.
뇌물수수혐의로 몰리다 자살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추모가 이토록 높은 이유를 이명박 정부는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사회 양극화가 심해진 것이 오히려 노무현 정권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높은 추모 열기는 바로 그가 여타 정치 체제가 반영하지 못했던 국민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소통하려고 했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지난 1년 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는 듯 하다. 그러나 촛불집회를 단순히 철없는 국민들의 불장난으로 여기는 태도에서 이미 그 문제점은 분명하다.
'국정 추동력'이나 '사회질서유지'와 같은 독재정권시절의 논리로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인 민주적 과정의 내재화를 성취할 수 없다.
분명 잘못된 검찰 권력의 남용과 정치적 사용에 대한 반성이나,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경찰력의 자의적 사용 방지도 중요하다. 책임자에 대한 문책과 대통령의 사과도 필수적일 게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 회복,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와 같은 것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성경 말씀대로 '더 낮은 곳에 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욕망의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이다. 국민의 행복을 위해 화해와 소통을 이제부터라도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