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영국 정치권이 고든 브라운 총리의 사퇴 논란으로 뜨겁다. 노동당 하원의원들이 브라운 총리의 사퇴를 종용하는 이메일을 준비했으며, 브라운 총리의 사퇴 지지 서명 운동이 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벌써 일부 영국 언론은 후임 총리 후보 및 총리 교체 절차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토니 블레어 총리의 뒤를 이어 총리로 임명된 브라운 총리는 최대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브라운은 총리직 초반 묵묵하고 단호한 이미지로 잠시 지지도가 상승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 뒤로는 계속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게다가 지난 해 여름부터 시작된 신용 경색과 경기 침체로 인해 지지율은 더욱 급격히 하락했고, 가장 최근 의원들의 세비 부당청구 논란이 이어지면서 더 이상은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각종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다음 총선에서 브라운 총리와 노동당은 제 1야당인 보수당은 물론 심지어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에도 뒤쳐지는 지지율을 보였다. 이와 함께, 이번 주 유럽의회 선거 지지율 조사에서는 보수당에 이어 유럽연합(EU) 탈퇴를 주장하는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에도 뒤쳐지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노동당으로서는 경쟁상대인 보수당은 커녕, 2순위 조차 차지하기 어려운 굴욕적인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 대처 미흡으로 이미 민심을 잃은 브라운 총리가 이번 의원 세비 부당청구 논란에서도 역시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이 같은 사태를 초래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사태가 악화되고 본인의 지도력과 정치적인 능력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브라운 총리 본인은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대응 및 여전히 본인은 총리직 적임자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 기존의 과묵한 이미지에서 이제는 답답한 이미지로 변모하고 있다.
브라운 총리는 최근 BBC Radio 4의 Today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은 총리직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으며, 그는 자신을 향한 교만하다거나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는 지적을 일축하고, 자신은 다만 차기 총선 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것 뿐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그는 최근 논란이 된 의원들의 세비 부당청구 논란과 관련, 정치권의 잘못된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에 자신이 바로 적임자라고 전했다.
이는 같은 사안을 놓고 데이빗 카메론 보수당수가 논란이 된 의원들에게 청구한 비용을 환불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사퇴하라고 지시한 발빠른 강경 대응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민심은 물론 노동당 내부에서도 브라운 총리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브라운 총리는 이번 주 유럽의회 선거 이후 개각을 단행할 예정인 가운데, 이미 주택수당 부당청구 및 세비 부당청구로 논란이 되었던 재키 스미스 내무장관이 사퇴할 것으로 전해졌으며, 헤이젤 블리어스 지역사회부 장관이 주택수당 부당청구 건으로 전격적으로 사퇴를 발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동당 내부에서도 현 사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인 브라운 총리가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민심을 잃은 책임이 지도자의 사퇴 압박으로 이어지는 영국 정치권의 논리가 다소 가혹하다고 여겨지는 한편, 결국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민심에 귀기울이지 않는, 민심을 확보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세비 부당청구 논란에서 브라운 총리 본인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지도자인 그에게 가장 무겁게 지워져야 한다는 게 영국의 논리이다.
문득 브라운 총리 말고도 민심을 잃을만큼 잃은 또 한 명의 지도자가 떠오른다. 그 지도자는 여러모로 브라운 총리와 닮은 구석이 있다. 초반 상당한 기대를 갖고 시작했으나 어느새 급격히 하락한 지지율과 등돌린 민심, 그럼에도 여전히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대책없는 낙관으로 일관하는 모습까지.
그러나, 민심을 잃은 책임으로 사퇴 압박을 받는 브라운 총리와는 달리 그 지도자는 사퇴 압박도 받지 않고, 오히려 힘(?)으로 민심을 잠재우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려는 듯 하다. 그는 지금이라도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지도자는 아무것도 지도할 수 없다는 진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