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교 일일현장 학습-이준 열사 기념관 탐방
독일 두이스부륵 한글학교(교장 오애순)에서는 5월2일 전교생이 네덜란드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버스 제공)
두이스부륵 한글학교는 독일학교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 학교가 쉬게 되면 수업 대신 일일현장 학습을 해 왔다. 그런데 이날 다른 도시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학교수업이 있어서 중고등학생들과 학부형들만 함께 하게 되었다.
학생 26명, 학부형 및 교사 19명을 태운 버스는 12시경 네덜란드 덴학(Den Haag)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 도착했다.
이기항(이준 아카데미 원장), 송창주(이준 열사 기념관 관장) 두 분의 극진한 환영과 송창주 관장님의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송 관장은 ‘역사는 내일을 비추는 등불’이라는 주제의 복사물을 나누어 주고 <이준 열사는 누구이며 이 기념관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가? > 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이 태어난 이면에는 한 한국인의 슬픈 죽음이 그 원인이 된다.
1907년 6~7월, 그 당시 드용(De Jong)이란 이름의 호텔이던 이 집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이 준, 이상설, 이위종 등 저 유명한 헤-그 특사 세 사람이 이 집에 머물렀다. 이들은 그 당시 이곳에서 개최 중이던 제2차 만국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의 무효와 대한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먼저 헤-그에 와 있던 일본의 방해와 강대국들의 냉대로 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한다. 이들은 할 수없이 회의장 밖에서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호소문>을 세계에서 모인 대표들에게 돌린 후 이 준 특사는 그의 숙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 날이 1907년 7월14일이며 작년 7월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가 태어나기도 했다.
이준 열사는 당시 48세로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검사), 이상설 열사는 당시 37세로 장관, 이위종 열사는 당시 21세로 3등 서기관이었고 외국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1907년7월5일자 평화회의보에는 회의장 앞에서 이위종 열사와 기자가 인터뷰 한 “축제 때의 해골”이 보도되었다.
그 글 마지막에는 이준 열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한글학교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다음 목적지인 튜율립 공원을 가면서 당시의 상황과 현재 중국 올림픽에 앞서 티베트의 평화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이 준 열사 기념관은 역사를 보존하고, 그의 ‘나라사랑’, ‘정의사랑’, ‘평화사랑’ 정신을 기리며 한국역사와 평화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다. 초청해준 이준 아카데미 이기항 원장과 송창주 기념관장께 감사드린다.
*두이스부륵 한글학교 행사 안내
5월10일(토요일) 전통놀이 학습마당 참가-본
두이스부륵 한글학교에서 8시15분 버스 출발
6월6일(금요일) 학부모를 위한 세미나
장소: 두이스부륵 한글학교 105호실
Schinkelplatz 2, 47051 Duisburg
시간: 16시부터 18시까지
주제: 다중어 시대의 2중언어의 필요성
참가대상: 일반인과 학부형
6월20일(금요일)
한글 읽기 대회 및 벼룩시장
*학교 수업: 매주 금요일 15:30-18:45
유로저널 독일지부
오애순 기자mt199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