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유럽 캠페인
상처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베를린 집회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20 만 한국인 여성을 비롯해 아시아의 젊은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본군인들의 성노예가 된 이른바 종군 위안부 정신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정부는 아직도 이 엄청난 범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사죄도 없으며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캠페인이 지난 달 베를린에서 열렸다. 캠패인 관계자들은 일본정부가 이제 고령이 된 피해자들이 자연적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며 일정부의 비겁하고 뻔뻔스러운 태도를 맹렬히 비난했다.
베를린에서 열린 이번 캠페인 대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비롯해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독일지역」, 「재독한국여성모임」, 「재독한국평화여성회」, 「베를린 한인교회」등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베를린 한인교회 집회는 피해자 길원옥할머니(81세)와 정대협 간사 안선미가 자리한 가운데 이영일 담임목사의 모두발언에 이어 한정로대표의 사회로 진행됐다.
정대협의 협의회 소개와 활동보고가 있은 후 길원옥 할머니가 연단에 오르자 장내는 이내 숙연해졌다. 길원옥할머니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동포들 앞에 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평양 근처가 고향인 길할머니는13살되던 해 고물상을 하던 부친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가자 돈이 있으면 아버지를 풀려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단순히 돈 벌 욕심에 취직시켜 준다는 중개인의 꼬임에 빠져 그만 낯선 여자들과 함께 만주로 따라나섰다. 이 길이 자신의 참담한 인생여정의 시작인 줄을 까맣게 알지 못했던 그녀는 그저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다면 됐다고 생각하는 효심 지극한 소녀였다.
그러나 길원옥을 기다리고 있던 곳은 만주 어느 낮선 고장 군부대 인근의 안전가옥. 그녀는 골방에 갖히고 난 뒤에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다.
만주로 끌려와서도 오랜 시일이 지나서야 초경을 치룰 만큼 아직 다 여물지 못한 어린 소녀는 무자비한 일본군의 군홧발 아래 내몰려 매일같이 성폭행을 당하며 치욕의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질 듯한 육신의 고통과 극심한 공포를 이겨내기엔 13살 소녀는 너무 어렸다. 매일 아침 두려움 마음으로 눈을 떴고 고통으로 울부짖었으며,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증언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먹이며 떨려 나온다. 팔순의 나이지만 여성으로서 느끼는 수치심과 모멸감은 여전히 할머니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녀는 죽지 않았다. 소녀는 살아 남아 지금 그들 일본군의 만행을 전 세계와 유럽에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당당히 외친다."일본정부는 사죄하라, 일본정부는 보상하라"
잔인한 일본군은 생리기간 중에도 전혀 배려가 없었다. 휴식도 주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군인들을 상대하다 성병에 걸려 극심한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차마 입으로 다 옮길 수 없는 일본군의 성폭행은 매일 계속됐으며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온 몸을 두들겨 맞기 일수였다. 길원옥은 일본군의 비인간적인 작태에 분노의 피가 끓었으나 나라 잃은 힘없는 소녀는 그저 목숨을 하늘에 맡기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일본군은 길할머니 나이 15세 때에 양쪽 나팔관 절단 수술을 강제로 시켰다. 이후 할머니는 군수품공장에 다니게 됐는데 할머니의 과거 신분을 아는 군인들은 시시 때때로 찾아와 할머니를 괴롭혔다. 한번은 술에 취한 일본군이 군도로 할머니 머리를 내려쳐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멘 적도 있다.
감추고만 싶었던 과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그 시간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옛 사건들이 되살아나자 또다시 감정이 복받쳐 오른 할머니. 그러나 길할머니는 말의 중심을 잃지 않고 차분히 증언을 계속했다. 할머니의 증언을 듣던 청중들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닦기도 했으며 일부 청중은 천인공로한 일본인들이 저지른 비참한 현장을 목격이난 한 듯일제의 만행에 치를 떠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악몽의 세월은 지나 해방이 되었다. 길원옥할머니도 귀국선을 타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보고싶고 그리웠던 고향, 내 나라 내 땅으로 돌아 온 할머니는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먹고 살기 위해 새로운 삶의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인천에 도착한 할머니는 번데기 장사, 노점상, 술집 종업원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우연히 남이 낳은 아기를 양자로 들이게 됐다. 멸시천대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쳤던 할머니는 사실 그때까지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 채 떠밀리듯 살아왔다. 그런데 아들을 얻고부터는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험하기만 한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라 생각하고 사랑과 정성을 쏟아 아들을 키우는 낙으로 살았다. 아들은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요 희망이었다.
할머니는 말한다. “그 아들 덕분에 죽지않고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온것 같아요 .
죄 안짓고 살려고 애쓰고요. 제 아들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쳐서 지금은 목사님이 됐어요. 그런데 고마운것은 엄마가 한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면서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답니다“
벅찬 감동이 청중들의 가슴을 울리며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길할머니는 지금 정대협에서 제공한 쉼터 우리집에서 살고 있다. "험한 세월 지내오느라 몸은 비록 골병이 들었겠으나 인간대접을 받는 지금 마음만큼은 평안합니다"는 말을 끝으로 눈물겨운 증언을 마쳤다.
길원옥 할머니는 숨쉬는 동안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며 일본으로 하여금 정부차원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받을 때가지 캠페인 운동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길할머니는 지난 해 유럽의회가 추진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정부의 공식사과와 배상요구에 관한 결의안 채택을 위한 캠페인에도 참석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많은 한국인 위안부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무엇보다 이에 대한 역사를 남기기 위해서 위안부 기념관 건립이 중요하다며 기념관 건립을 위해 모두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은 동포 외국인을 막론하고 이날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할머니를 통해 일제 만행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던 동포들은 우리 조국이 더욱 단결되고 부강해야 하겠다는 민족의식에 한껏 고취되었다.
자료제공 : 베를린 한인교회 조영자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지사장 김운경
woonkk@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