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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100주년 축하행사 준비가 한창인 St.Ottilen 성 분도회 선교수도원

by 유로저널 posted Mar 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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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커스-김 영자 박사는
독일 레겐스부르크대 명예교수. 1975년에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6년에는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했으며, 우리나라의 국보 306호인 삼국유사를 독일어로 처음 번역하여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하는 등 우리 말과 글을 유럽 지역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녀는 2007년 한국방송공사가 주는 제14회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베커스김 영자 박사가 보내온 글을 3회에 걸쳐 올린다.
(독일지사 오애순 기자)  

Benediktner Missionskloster ST.Ottilien (1)
한국선교 100주년 축하행사 준비가 한창인 St.Ottilen 성 분도회 선교수도원

Dr.Beckers-Kim Young-ja

1. 역사적 배경
18세기 말, 19세기 중엽 중국. 일본과 강제적으로 통상조약을 맺은 서양의 경제세력이 조선과 통상을 맺으려 무력을 동반하고서까지 조선의 해양을 넘보았다. 그러나 굳게 빗장을 지르고 쇄국정치를 고집하는 조선국 고종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은 외국인은 조선땅에 발을 들이지 못 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천주교가 국내에서 극비속에 활기를 띄우던 때였다. 심지어 대원군의 부인까지 영세를 받았다. 대원군은 서양의 외세침략을 배척하기 위해 천주교인을 참형했다.(세 차례 천주교인 박해사건) 그래서 한국 천주교인 치명자로 성인품에 오른 분이 참으로 많다. 물론 중국에서 비밀리에 조선땅으로 건너와 '안방'에서 숨어살면서, 상제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사제없이 스스로 교인이 된 조선 나라 천주교인과 함께 지냈던 서양 사제들까지 참형당했던 것이다.

1882년 외세에 굴복한 조선은 첫번째로 미국과 외교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통상조항에는 외교관, 상인은 물론 선교사들의 입국이 허락되었다. 미국에 이어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서로 조선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으면 '떼부자'가 되는 것처럼 다투어 경제우호관계를 앞세우고 조선땅을 찾으면서 미지의 나라를 탐험하려는 호기심으로 충만한 서양인들이 최국동 아시아의 미지의 나라 한국땅을 찾았다. 당시 선박여행이었으니 이태리 항만에서 출발해서 미국이나 중동아시아 지역을 거쳐 아시아땅으로 오는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이때부터 '은둔의 나라 조선'이란 제목으로 여행자의 자국에서 한국견문기가 꽤 많이 ㅆㅗㅅ아져 나왔다. 이러한 한국에 관한 기사들은 '조선'에 관한 정보가 원래 빈약했기 때문에 일본과 중국에서 출간된 저서에 의존했다. 즉 선입관을 앞세워 나온 견문지라 왜곡된 부분이 상당하지만 서양에 미지인 한국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19세기는 조선왕국에 폭풍의 시대였다. 일본은 서구세력에 무력으로 굴복하고 통상수호조약을 맺은 후 즉시 서구문화와 교육을 받아드렸다. 바로 '명치유신'정책이다. 서양에 우수한 내국인을 유학보내고 각 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서구의 현대문명을 일본으로 수입했다. 서양의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해서 고급교육기관을 운영하게 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개혁파와 수구파가 우왕자왕 하면서 중국 청나라나 러시아의 보호에 의존하기에 급급했다. 서양인의 견문기안에는 '우왕자왕'하는 조선 조정과 관리들의 모습이 잘 구사되어 있다. '한국을 삼키려는 일본'을 우려하는 내용, 세계정세를 읽지 못 하는 조선을 우려하는 내용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구한말 조선왕국이 실제적으로 일본의 정치하에 들어갔다. 일본은 조선국에서 활동하는 서구 외교관, 상인, 선교사 등 한국을 침략하는데 국제외교상 '걸거치'는 대상을 출국하도록 강요했다. 한국침략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독일 공사관 및 타 서양의 외교관 모두철수를 했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의 개화기가 서양 종교계의 영향을 입게 된다..
외교수호통상조약의 영향으로 조선에 입국한 캐나다. 미국 등지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국내의 남여차별을 없애는 운동, 남여 교육기관을 설립하며 의료시설을 개설하는 등 한국사회의 개화에 앞섰다. 조선의 젊은 학도들은 일본이 받아드린 서양문화를 함께 공존할 기회도 얻었다. 20세기 초 한국의 개화기의 간단한 일면만을 알린다.

한국의 천주교는 역사상 조선인 스스로가 받아드린 종교이다. 조상숭배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서구 외래 종교, 남여차별이 없는, 개인의견을 존중하는 교리가 유고를 숭상하는 조정 관리에게 용납될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국의 천주교는 핍박의 시기를 극복했다.

후에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는 독일 선교분도회는 1884년에 남독일 Oberpfalz지방에서 시작된다. 수도원 식구가 늘자 3년후 뮌헨으로부터 서쪽 Emmig지역으로 수도원을 옮긴다.
1896년 Benediktinerpriorat(수도본부)으로 승진, 1914년부터 Erzabtei 총본부 수도원으로 승격한다. 분도회는 미개발문화국 선교를 주 목적으로 한다. 창립한 지 얼마되지 않은 수도회지만 이미 1887년에 아프리카 (Tanganiyika/Deutsch-Ostafrika)선교를 시작했다. 현재 세계 4대주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만도 수도원 지부가 10 여 곳이다. 한국의 소도원 본부는 경상도 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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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아시아주 선교지로 한국을 택하고 서울(용산)에 본부를 두었다. 교인의 신앙, 사제양성, 초등교육 및 기술직교육을 주도했다. 얼마후 북한 원산 인근 덕원에 수도원을 세우고 같은 선교사업을 하는 중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49년 수도신부 및 수녀들이 억류감금되어 사형, 옥고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휴전후 석방되지만 다시 남한으로 내려가 왜관에 수도원을 세워 현재까지 활발하게 선교사업을 이어가고 있다.(100주년 선교축하행사준비가 한창이다.)

상기 소개한 분도 수도원에서는 3월 7일 열릴 한국선교 100주년 경축문화행사준비가 한창이다.
왜 남독일 지역의 상트 오틸리언 선교분도회가 우리 한국인과 남달리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음 호에 소개하겠다.
(Beckers-Kim영자, beckerskim@hanmail.net)

유로저널 독일지사 오애순 기자
mt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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