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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법정이 인종차별을 자행한다?

by 유로저널 posted Oct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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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독점


한인이민사 법정비화
수백억 자산 되찾기 위해 독일법원과16년간 투쟁 (1부)

독일법정이 인종차별을 자행한다?
(원제: Gibt es Rassismus in deutschen Gerichten?)




독일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인츠 소아과의사 이수길박사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기라성같은 독일 유명 출판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4 번 전시관에 부스를 차리고 「독일법정이 인종차별을 자행한다?」(Gibt es Rassismus in deutschen Gerichten?)는 제목의 저서를 전시해 방문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길박사는 지난 60년대 초 한국의 간호사들을 최초로 독일에 취업시킨 한인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인물이며, 동시에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제보에 따라 한국으로 납치당해 모진 고초를 겪었던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격었던 이민 원로이다. 그런데 이수길박사에게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소아과의사였던 그가 우연한 기회에 독일 유명 브랜드의 한 남성의류회사를 인수하고 사장을 지내다 주거래은행의 불법적이고 간교한 술책과 독일법원의 공정치 못한 판결에 의해 수백억 재산을 고스란히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이번에 이에 관한 책을 펴내면서 이박사는 지난 20년 동안 마음 한켠에 꽁꽁 싸매두었던 억울한 사연을 유로저널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기사는 이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미국-이라크전이 한창일 때 매스컴을 통해 소개됐던 유럽 내 최대 미군공군기지와 최대 미군 야전병원이 있는 람슈타인(Ramstein)시. 20년 전 이곳 시내 중심가에는 지오바니(GIOVANI)라는 브랜드의 남성의류공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회사는 생산규모면에서 독일에서 여덟 번째로 크고 라인란트 팔츠 주에서는 가장 큰 의류회사였다. 대지 9.344 제곱미터에 건평 8.008 제곱미터, 4층으로 지어진 지오바니는 당시 최신식 설비를 갖춘 공장으로서 종업원 수만도 수 백명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지금까지도 람슈타인 시의 중심 건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지오바니(GIOVANI)는 1922년에 설립되어 한 때 560명의 종업원을 거느릴 만큼 성장하다가 창업자 큔 박사가 사망하면서 경영부진에 시달려 결국 1988년에 파산했다. 졸지에 수 백명의 실업자가 양산되자 라인란트 팔츠 주 정부는 이 공장을 어떡하든 회생시키고자 능력있는 새 경영자를 찾아 나섰다. 이 때 한국의 H 기업이 인수 할 뜻을 비쳤다. 그리고 한독간에 교량역할을 해 온 인물로 잘 알려진 이수길박사가 한국회사의 요청으로 M&A 상담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박사가 이 일에 엮이게 된 동기였다. 하지만 H사의 지오바니 인수 건은 불발로 끝났다.

한국기업의 인수가 물거품이 되자 이박사와 친분관계가 있던 당시 경제성 차관보 B씨가 이박사에게 지오바니를 인수해 경영해 볼 것을 권했다. 이박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당시의 독일화폐로 80만 마르크를 투자하고 병원과 개인주택을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는 등 전 재산을 투자해 공장을 인수했다. 한편 라인란트팔츠 주정부에서도 2백 60만 마르크의 재정보증과 40만 마르크의 무상지원을 통해 이박사의 인수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같은 주의회의 특혜는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한다.

지오바니사의 주거래은행인 V은행(저서에서는"Lug-& Trugbank, Ramstein"로 표기됨, 이수길씨의 변호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은행명을 가명으로 표기할 것을 권했음)으로부터 인수금 융자를 받았고, 라인란트팔츠 주재무성 소속 F 은행이 연대보증을 섰다. 이같은 절차를 거쳐 이수길박사는 1988년 6월 마침내120명의 종업원과 함께 지오바니를 넘겨받았다.

이때부터 이박사는 소아과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일주일에 하루는 람슈타인 회사에 출근해 경영을 진두지휘했다. 이런 두가지 일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당시 경험이 풍부한 독일인 영업사장과 생산사장이 있어서 이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회사를 이끌어 주었기에 가능했다고 이박사는 술회한다.

이박사는 이들 전문인들과 함께 회사를 운영해 나갔다. 그리고 1년 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경영부실로 파산했던 회사가 인수 후 고작 1년만에 1천만 마르크 이상의 매출실적을 올리면서 오랜 적자의 늪에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박사는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구조조정 등 경영합리화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것이 주효했댜.

남성용 바지만 중점적으로 생산하던 지오바니는 1991년부터 한국 모 그룹 섬유팀과 공동생산체제를 갖추면서 남성양복, 스웨터, 셔츠 등을 추가로 생산, 날로 확장 일로의 길을 걸었다. 회사의 목표도 당시 독일 최대 남성의류회사인 보스(Boss)사와 경쟁한다는 데 둘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누적 적자로 파산선고를 받았던 회사가 한국인들이 들어서면서 불과 1년 만에 기적처럼 살아나자 주거래은행인 V은행의 T 은행장이 1989년말 갑자기 이박사에게 지오바니사를 원래의 구입가대로 독일인에게 양도하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영문도 알 수 없는 이박사는 당연히 이 제안을 거절했다. 수 차례에 걸려 거절을 당하자 V은행은 1991년 6월 느닷없이 운영 및 투자자금 크레디트 협정서를 파기한다고 통보했다. 파기 이유는 1991년 1/4 분기 이자 102.347 마르크와 1991년 상반기 투자상환금 73.800 마르크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지오바니사는 이 금액을 대출계약대로 하루도 지체 없이 지불했다.

그런데 지오바니가 대출받은 운영 및 투자자금 총 4백50만 마르크에 대한 해약은 주정부 소속 F은행의 사전 허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V은행은 해약하기 불과 2일 전 전화로 F은행에 지오바니사가 1991년 1/4분기 이자 102.347 마르크와 1991년 상반기 투자상환금 73.800 마르크를 미지불 했으니 해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해 즉석에서 구두허락을 받아 냈다. 이에 대한 증빙 자료는 후에 법정에 제출되어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V은행은 허위사실을 신고했고 F은행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해약을 승인하는 엄청난 불법을 저질렀으며 뿐만 아니라V은행 T은행장은 한 지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오바니사가 많은 이자와 상환금을 지불하지 않아 해약했다고 거짓 증언을 되풀이했다고 이수길씨는 주장한다.

T은행장의 허위사실 유포 행위가 계속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박사는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독일검찰청은 방대한 조사를 마친 후 관할 법원과 협의를 통해 T씨를 불기소 처리했다. 그 근거는 T은행장이 전과자가 아닌데다가 이번 사건을 단순한 실수로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V은행은 지방법원 지원에 지오바니사의 파산을 신청을 했다. 신청사유는 은행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관할법원은 V은행의 요청대로 1991년 12월 2일 파산을 선고했다. 지오바니사는 즉시 항소하여 한 달 후인 1992년 1월 22일, 1심에서 내린 지오바니사에 대한 파산선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이 판결로 지오바니사는 다시 공장을 가동할 수 있었다. 이후 지오바니주식회사는 법적으로 2007년 5월 9일까지 존속했다.

하지만 V은행의 부당한 행위는 점입가경이었다. 파산선고가 나오기 전인1991년 11월 26일에 V은행은 관할법원에 지오바니사에 대한 법정관리인을 선임을 요청해 법원으로부터 법정관리인을 배정받았다. 파산이 선고된 회사의 공장설비들과 집기 등을 강제집행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은 법정관리인은 공정한 집행을 해야 할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는  V은행의 편에 서서 공무를 집행했다.

놀라운 일은 어느날 지오바니 사원들이 아침에 출근해 사무실과 공장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출입구가 열리지 않았다. 밤새 법정관리인이 열쇄를 교체해버린 것이다. 출입이 통제된 지오바니는 공장을 가동할 수가 없었다. 본사에 출근할 수 없게 된 직원들과 판매인들은 임시로 마련된 에쉬보른 소재의 S기업 독일지사 건물에서 근무를 계속했다.

지방법원의 파산선고 무효판결에 불복한 V은행이 고등법원에서 항소했다. 고등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에 따라 파산선고하급법원에서 선임한 법정관리인은 당연히 취소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법원은 그의 활동을 제재하지 않았다. 그는 V은행의 요구대로 공장의 기계들을 팔아치기 시작했다. 그는 1991년 11월부터1994년 3월 공장건물을 강제 매각하기까지 지오바니 공장을 불법으로 점유했다.

이 뿐이 아니다. 원단은 헐값으로 독일 의류업체에 팔아 넘겼고 제품의 판매대금도 은행에서 강제 수금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들은 지오바니사의 항의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V은행의 불법성을 드러낼 뿐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1992년3월 공장설비가 강제 경매를 당하자 지오바니는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어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3월 17일, V은행은 당시 시가로 1천만 마르크에 달하는 지오바니사의 대지와 건물을 경매에 붙여 단돈 2백만 마르크에 독일인들에게 넘겼다.

1991년 6월에 근거 없이 저질러진 운영 및 투자자금 해약은 5년 뒤인 1996년 3월 26일자로 독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이수길박사는 빗더미에 올라 앉았다. 한국인 소유의 지오바니 의류공장이 대낮에 눈뜨고 코베가듯이 강제로 빼앗기는 과정은 마치 나치 시대 유태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며 이수길박사는 지금도 그때를 잊을 수 없는 듯 주먹을 불끈 쥔다.

다음 주에 2부가 계속됩니다.



유로저널 프랑크푸르트 김운경
woonk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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