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76)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Aug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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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영미는 김이 오르는 ‘다라이’에 함께 들어가 몸을 씻어주고 어루만지며 서로를 애틋하게 탐하는 두 사람의 신혼시절을 그려보았다. 동네에서는 둘의 조합을 ‘선녀와 나무꾼’이라고 했다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입장을 십분 고려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미녀와 야수’의 만남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만큼 엄마는 근동에서 미모가 출중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럼 어찌하여 그 아름다운 처녀가 제 땅에서는 감자 한 톨도 수확할 수 없는 가난뱅이 총각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다는 것을 근년에야 알았다.

영미가 장 마담과 함께 점집을 찾은 날은 정확히 재작년 정월 초사흗날이었다. 새해가 열리면 장 마담은 매번 용하다는 점집에 들러 그해 신수를 보곤 했는데, 그날은 장 마담이 전날 언 보도에서 안 넘어지려고 버티다 손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영미가 대신 운전을 하게 되었다. 엉겁결에 점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간 영미는 함께 들어가 점을 보자는 장 마담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무당이 정식으로 운영하는 점집이어서인지 까닭 없이 몸이 떨렸고 묘하게 긴장도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기실에 있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이 바뀌었다. 긴장감도 떨림도 여전했으나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무섬증이 무시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점집은 만원이었다. 대기자가 많아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마침내 대면한 무당! 그는 제대를 등지고 앉아 탁자 위에 손을 다소곳이 얹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긴 머리칼에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있어서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남자였다. 장 마담과 영미가 방석을 당겨와 나란히 앉자 그가 눈을 떴다. 날카로운 시선이 장 마담을 거쳐 영미에게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그가 화들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영미를 향해 큰절을 하듯 납작 엎드렸다.

“아이고, 할마니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제일 놀란 건 영미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살펴봐도 방안에는 박수무당 외에 영미와 장 마담뿐이었다. 무당은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할마니! 제가 잘 타일러서 보낼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가세요. 아이고, 그럼요. 걱정 마시라니까요. 네, 네, 할마니. 나중에 저 신기 떨어지면 그때 오셔서 도와주세요. 살펴가세요, 할마니!”

무당의 혼잣말에 영미도 장 마담도 어안이 벙벙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무당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그가 자꾸 영미의 머리 위를 힐끔거렸다. 그래서인지 영미는 자기 머리 위에 정말로 뭔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로 입을 축인 그가 영미에게 나무라는 투로 한 마디 했다.

“너는 오려면 혼자 오지 왜 할마니까지 모셔 와서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느냐.”

영미가 손으로 저를 가리키며, 제가요? 하고 대꾸했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그럼 너 말고 누가 있어, 하고 짜증을 냈다.

“동자님!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저는 도통...”

무당이 장 마담의 말을 잘랐다.

“얘가 난데없이 지 외할머니를 모시고 왔잖아. 노인네 아직도 기운이 팔팔하네. 저 어른이 현역 때 인근 백리 안 명산의 기를 한 손에 쥐고 흔들었지. 내가 아는 한 강신무(降神巫) 쪽에서도 세습무(世襲巫) 쪽에서도 유일하게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추앙받은 최고의 만신(滿身)야.”

영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희 외할머니가 무당이었다고요?”

“동자님 모시고 내가 헛소리하겠냐?”

“그럴 리가요, 저희 어머니는 고아셨는데.”

아버지는 늘 엄마 얘기를 할 때마다 고아로 외롭게 자란 데다 시집이라고 와서도 고생만 하다 비명에 갔다고 눈물바람을 하셨다. 무당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역정을 냈다.

“이런 바보가 있나. 세상에 양친 없이 태어난 아기가 어디 있고, 고아 아닌 인간이 어디 있다니. 부모 돌아가시면 다 고아인 게지.”

장 마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영미도 잠자코 있었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더니 영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영미는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몸을 흠칫 움츠렸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틀더니 재채기를 하듯 숨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접신 중이야, 장 마담이 소곤거렸다. 무당의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오라, 이제 알겠다. 넌 내림굿을 받아야 했어. 그랬으면 벌써 머리 위에 황금 왕관을 썼을 거야. 그래서 네 외할미가 그리도 널 무당이 되게 하려고 애쓰셨구나. 가만 있자 근데 왜 그 귀한 끈이 끊긴 거지?”

혀 짧은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말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 짐작이 되는 남자 아이 목소리였다. 그가 다시 심한 재채기를 해댔다.

“세상에나 독하기도 하지! 새끼를 지키려고 일부러 구천을 떠돌다니!”

무당의 중얼거림에 영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마땅히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되어야 할 운명인 영미가 지금껏 무병을 앓지 많고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네 어미가 지금도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구천을 떠도는 것은 구천에 있어야 이승에 일을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지. 참으로 무섭고 장한 모정이다.”

문득 영미의 뇌리에 산통 끝에 영남의 머리를 몸 밖으로 내보내고 그대로 늘어졌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미는 울음을 터트렸다. 꽃길로 가셔서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실 거라 생각했던 엄마가 자식 걱정에 아직도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니,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네 어미와 외할미는 구름 낮고 마파람 부는 날이면 어김없이 너를 놓고 다투고 싸운다. 아이고, 박복도 해라. 이걸 어쩌면 좋누! 넌 출생에도 비밀이 있구나....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내 입장만 곤란하니까.”

박수무당은 그날 영미에게는 복채도 받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이미 계산을 했다는 거였다.

점집에 다녀온 이후, 영미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게 사실인가 싶어 일손도 잡히지 않았다. 그게 사실인가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루 휴가를 받아 양로원으로 갔다.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영미가 눈물바람을 하며 바짝 다그쳐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거참 용한 무당을 만났구나. 맞다, 너희 외할머니는 근동에 신딸만 수십 명을 둔 대단한 큰무당이었다. 나도 듣기만 했다만 백리 안 큰굿은 네 할머니가 도맡아했다고 하더라.”

박수무당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영미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 외할머니의 정체를 알고 나니 오히려 좀 허전해졌다.

“근데 아버지는 왜 그리도 쉬쉬하며 엄마를 고아라고 한 거예요? 외할머니가 무당이라는 게 어때서요?”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구겨진 도화지 같은 표정에 회한의 그림자 같은 것이 짙게 드리워졌다. 아버지는 한참 후에야 주저하며 두 분의 결혼 비화를 털어놓았다.

“엄마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외할머니처럼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되어 가업을 잇는 것과 그냥 멀리 시집을 가는 것. 엄마는 어려서부터 무당은 절대로 안 한다고 선언을 했고 그러니 시집을 가야 했지. 근데 무당의 딸이라는 신분 때문에 쉬 혼처가 나오지 않았어. 그러던 차에 먼 동네 총각 눈에 엄마가 들어온 거야. 엄마의 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청혼을 한 거지. 그는 양반 떨거지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만 제법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혼처였다고 해.”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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