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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04:05
사랑의 역사 - 프랑스 역사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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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부터 근대까지 교회와 왕실에서는 혼외 정사를 강력하게 금지시킨다. 중세 프랑스에서 혼외에 만들어진 아이들이 한 때 50%에 이르렀다면 절대 왕정 루이14세 시절에 와서는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교회와 왕실이 절대 권력을 쥐고있던 시절에 사랑으로 유희를 즐기면 범죄가 된다. 이 시절 교회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고해성사로 해결이 안 되는 죄들이 켭켭히 쌓였을 때 특권층 죄인들은 특사를 요청하고 면죄부를 요청하게 된다. 고해 신부들이 끊임 없이 도덕적으로 성결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면 사후 뜨거운 불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협박을 거듭해도 그 거듭되는 협박만큼이나 성적 일탈의 죄도 거듭된다. 많은 성범죄의 대부분은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실과 귀족들이나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발생된다. 귀족들이 재물을 투자하듯이 자식을 낳아 큰 아들은 귀족의 칭호를 세습하고 둘 째는 군대에 보내 장군을 만들고 셋 째는 교회에 보내 고위 성직자들을 만들 때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세 말에 이르러 교회의 치부가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청빈과 겸손과 순결의 복음적 교리와 어긋나는 현실의 행태는 중세를 폭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그들의 하느님과 말씀을 교회에 가두어 두고 고위 성직자는 특권을 부여 받아 강력하게 그 권력을 행사한다. 15세기 초 콘스탄스 공회에 참가한 성직자들은 29명의 추기경, 33명의 대주교, 150명의 주교 그리고 100 여명의 평신부와 300여명의 신학 박사들 이었다. 수행원이 만 오천명에서 2만명으로 추산되며 그 외에 수 백명의 위안부들이 동행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는 위안부가 오 천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주 고객은 종교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악덕의 본보기는 아주 높은 곳에서 보여 준다.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반 개혁을 주장한 교황 바오로 3세는 세 아들과 두 딸의 행복한 아버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과 노예상으로 무덤을 장식하려 했던 율리우스 2세는 수 많은 애인과 몇몇 남친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 교회에서는 간통을 규칙적으로 엄격히 다스렸다. 율리우스2세 교황 시절 마틴 루터 신부는 로마를 방문하여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과 성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를 보고 정신적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구제도 왕실의 역사는 섹스의 역사다. 프랑스의 왕실의 권력자들을 살펴 보면 우연히 왕실에 태어나 권태로운 삶을 영유하며 왕좌에 붙어 있다. 황실 가족들은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가장 쉬운 취미로 짐승사냥이나 여자 사냥에 나섰던 것 같다. 왕실의 사랑이야기는 어쩌면 감정의 문제라기 보다는 소비의 문제다. 감정이 배제된 사랑은 왕실의 가장 흔한 소비재 중의 하나다. 문제는 사랑의 비용이 너무 과중하다는 것이다. 16세기 말 앙리4세의 애인에 대한 비용이 천만 유로를 넘어서고 딸을 왕에게 넘겨준 그 아비는 대원수 지위의 지휘봉까지 요구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여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앙리4세의 여인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1598년 신구교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 낭트 칙령 »에 싸인하게 했다. 루이15세 당시 왕의 애인 뽕빠두르 부인은 왕으로 하여금 베르니와 쉬오쉘 두 재상을 임명케 한다. 루이14세 왕에게 루이즈 드라 발리에르 부인이 낳아준 두 아이에게 왕이 하사한 한 해 선물 비용이 450만 유로였는데 그 금액은 왕실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받은 금액의 두 배가 넘는 거액이었다. 예술 애호가였던 프랑스 왕 루이14세가 간통으로 만들어진 가족 전체를 위해 유용한 금액은 예술가들에게 사용하는 비용의 수 십 배에 달했다.
당시 몰리에르 극단의 비용보다 2천배나 더 되는 3천만 유로를 몽떼스팡 부인의 성을 짓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루이14세의 여인들을 위한 비용은 베르싸이 왕궁 건설비용을 능가하고 있다. 왕은 마담 드 몽떼스빵, 마담 드 멩뜨농을 왕비 사후 정실 부인처럼 왕궁에 거주하게 한다. 프랑스 왕은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권력의 화신 루이14세도 왕비 사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비밀 결혼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이혼이 합법화 된 것은 지극히 근대사의 일이다. 국왕의 부인이 돌아가시고 두 번째 세 번째 여인이 왕실에 들어와도 합법적 부부로 인정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몰리에르)
귀족의 지위와는 상관 없이 왕이나 황제의 관대함에 넋을 잃은 귀족 부인들의 싸움은 처절하고 왕의 마음을 낚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왕을 움직여 하룻 밤 만리장성을 쌓은 여인의 일생은 안정이 보장된다. 일단 거액의 하사금이 지불되고 남편이나 친정 일가 모든 사람들의 자리 배치가 달라진다. 하지만 간통의 자식들의 운명은 그리 밝지 못하다. 왕족이나 귀족의 핏 방울이 몇 방을 섞었어도 그 지위는 영원히 적자의 지위를 넘 볼 수 없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서자 샤를 레옹의 경우 도박과 술로 망가지고 빚을 지고 감옥을 살고 그 손자는 1950년대 버스의 검표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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