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속의 여성- 한국의 여류화가를 찾아서 2. 박래현 (3)
운보 김기창의 예술적 성장과 성공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후원자인 동시에 자극원이었고 네 아이의 교육과 성장을 전담한 어머니였던 우향 박래현.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는 끈을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었던 선구적 여성 화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어떻게 여성에게 부여되어온 편견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으로서, 또 작가로서 직립하고자 하였을까? 결혼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작품 세계를 확장해 나간 우향 박래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박래현이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남긴 고백을 보면, 스스로 "혼자 살 것을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맹세"해놓고도 결혼한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창작활동과 가정주부의 역할을 병행하는 것의 어려움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우선, 살아온 환경이 매우 다른 김기창과 박래현의 결혼생활에는 난관이 많았다. 박래현은 김기창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상황을 "문턱이 어찌나 높았던지 타이트 치마의 제한된 폭에 걸려 그만 정강이뼈를 힘껏 치이고, 첫 방문에 남다른 인상을 가졌다. 우리의 결혼에는 그 같은 아픔이 수없이 따랐다. 여기 첫 종을 울려준 셈이라고나 할까"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김기창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는 "조그만 분노와 슬픔이 마구 소용돌이 쳤다"고 심정을 토로하는가 하면, 결혼식 당일에 대해서는 "1월 27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침에 아악(雅樂)의 구슬픈 음률을 따라 우리의 언약은 끝이 났다. 경축의 음률이 다시 흘러 나왔을 때, 내 발등에는 큼직한 눈물이 거침없이 떨어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혼 10년 만에 쓴 남편에게 드리는 글 에는 결혼생활과 창작활동을 병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가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네 아이의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려올 때, 대견한 날들이었다고 생각도 하지만 하잘 없는 반생을 허름한 보자기에 둘둘 말아 등 위에 얹어 놓은 것같이 그저 피곤하기 만 합니다. (중략) 당신은 항상 나보고 욕심쟁이라고 하지요. 정말 그런가 봅니다. 나한테는 양처(良妻)도 현모(賢母)도 다같이 어려운 일이니까요. 현실에선 평범한 아내가, 어머니가 되는 것조차도 겨운 일 같습니다. 작품이라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은 주변의 아무것도 생각하게는 되지 않으니 말이지요. 지금 형편 같아서는 시중을 하는 편이 아니라 받는 편이고 보이 늘어가는 것은 마음의 부채뿐이군요. (중략)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여성만이 갖는 고통에 맑아질 날이 없습니다. 당신도 장 가를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우향 박래현의 모습
운보 김기장이 그린 우향
작품 활동 중인 우향 박래현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내면화해왔지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아 내와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1959년의 <자유A> 와 <자유B> 같은 작품에서 새장 속에 갇힌 새의 이미지는 작가 자신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46년 결혼 이후에는 주로 부부전 형식으로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에, 김기창과 화풍상의 유사성 유무를 떠나 당시 박래현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는 "김기창의 부인"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박래현으로서는 김기창과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노릇 이었다.
한 방에 펼쳐지는 두 개의 세계.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 무서운 대결이 아닐 수 없다. 같은 길을 가는 괴로움, 그것은 한 고장에서 색다른 두 마을을 꾸미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 박래현에게 세계여행은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 것은 나로서는 첫손에 꼽는 일이지만 그 앞에 서면 언제나 마음이 새롭게 설레었다"고 한다. 세계 각지의 유물들은 박래현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1966년에 김기창과 함께 연 귀국전에서 박래현은 태피스트리를 출품했는데, "장식용 수직 직물, 털실, 수실 등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구성과 매듭, 술들을 곁들인 이 작품들은 인디언의 편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또한 여행에서 자신이 보았던 다양한 공예품을 매우 꼼꼼하게 그린 드로잉들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드로잉들은 여행 후에 새롭게 도전한 도자기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조문도화(鳥紋陶畵)>(1960년대 후반)처럼 청색과 갈색으로 조화를 이룬 도자기 그림은 전통적인 도자기 안료인 청화와 진사로 그린 것으로, 중남미 여행에서 스케치해 두었던 이미지를 활용하여 전통 도자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도자기를 제작하게 된다. 세계여행이 박래현에게 무엇보다도 의미 있었던 것은 결혼 전에 꿈꾸었던 미국유학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1960년대 미국 화단의 역동성을 보았고, 미국에서 새로운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 화단에서 새롭게 부상하던 판화가 자신의 기질과 잘 맞는다고 판단하고 판화를 공부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판화 기법 중에서도 동판화와 석판화, 메조틴트와 같이 꼼꼼하고 치밀하게 공들이는 기법의 판화에 몰 두 하였다. 한국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동양화가로 한정 지어야 했지만, 세계 여행에서 다양한 종류의 미술품을 접하면서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자신의 기질에 적합한 표현매체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긴 것 이다.
1969.10 뉴욕에서 만난 한국 문인들과 화가들. 맨 뒷줄 우향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 4번째.
박래현은 작고할 때까지 먹과 붓과 화선지에서 벗어나 판화, 태피스트리, 도자기 등 자신이 선호하는 매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렇듯 표현장르를 넘나들고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태도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것으로서 일찍이 포스트 모던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혼 이후로 부부 전을 고수하던 박래현이 1974년에 귀국하면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박래현은 세계여행을 계기로 남편을 수발해야 하는 '아내로서의 의무감'에서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남편 김기창의 아우라에서도 벗어나 독립된 미술가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허유림, 유로저널 컬럼니스트, 인디펜던트 큐레이터, 예술기획 및 교육, Rp’ Instit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