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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나침반 #7 문명의 숲에서 방황하는 인간 인간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본능적인 ...Posted in...
by eknews / on Jul 08, 2016 07:29
내 영혼의 나침반 #7 문명의 숲에서 방황하는 인간 인간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본능적인 ...Posted in 박심원의 내 영혼의 나침반 / by eknews / on Jul 04, 2016 22:12
내 영혼의 나침반 #7 문명의 숲에서 방황하는 인간 인간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본능적인 삶이라면 고생은 할지라도 그 어려움을 통하여 깨달음이 없기에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깨달음이 없게 되면 같은 고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생각은 현실의 삶을 초월하여 기쁨을 만들어 내며, 삶의 고난과 역경을 행복으로 극복해낼 수 있게 해 준다.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물건처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여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보이면 소유한 것이요, 보이지 않게 되면 소유하지 않은 것이다. 행복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생각으로 느낀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인(Metaphysics) 사고를 말한다. 형이상학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근본'이란 명쾌한 해석을 내 놓았다. 존재의 근본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주어진 모든 상황이 버겁기만 하다. 일 달러를 벌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위태로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는 무지기수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인구는 2016년 6월 현재 73억 명을 넘어섰다.(www.census.gov/popclock) 그 중 절반은 빈곤에 굶주려 있고, 빈곤한 인구 절반은 절대 빈곤으로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인 "래디컬"이란 책에 세계 상위 15%안에 드는 부유층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마도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똑바로 보라,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콸콸 나오고, 더위와 추위, 이슬을 막아 줄 집이 있고, 입을 옷이 있으며, 먹을 음식과 타고 다닐 교통수단(대중교통이라도)까지 있다면 세계를 통틀어 상위 15% 안에 드는 부유층이다." (데이비드 플랫 / 래디컬 pp. 158-159 / 두란노 2011). 스스로가 부자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런던에서 유명 명소로 꼽히는 헤롯 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다. 아이들 장난감용 자동차가 만 파운드에서 삼만 파운드 정도의 가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많은 사람이야 그 정도는 작은 금액일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절반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어서 절대 빈곤에 허덕이며 그중 절반은 먹지 못해 죽어 가고 있는데 정원에 굴러다니는 장난감용 자동차가 수만 파운드 한다는 것에 왠지 죄스러운 느낌이 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문명의 세계가 그러하다. 처음부터 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생각 속에 어설픈 자동차가 존재했을 뿐이다.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비행기 역시 생각 속에 먼저 존재했기에 그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 속에 존재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는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형이하학적(Concrete science) 세계인 것이다. 형이상학적 세계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라면 형이학적인 세계는 보이는 세계인 물질적 세계인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것이다.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만약 보이는 물질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라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지만 행복의 개념은 물질계의 차원이 아니기에 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 사전적 의미처럼 편안하고 안락하여 걱정근심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 자라는 견공은 편안하고 안락하고 걱정 근심이 없는 상태로 길러진다. 주인이 개를 따라다니면서 똥을 치워주고 목욕시켜 주고 음식을 바친다. 그렇게 인간의 온실 속에서 생활하는 견공은 행복할까? 과거에는 없었던 질병들이 애완견들에게 나타난다. 온갖 종류의 암을 비롯하여 인간에게만 나타났던 각종 질병들이 견공들에게 발병하고 있다. 과거 동물들이 앓고 있는 질병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과 접촉하여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가진 편리해서 오는 질병을 그대로 전수받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삶이 편해지게 되면 주어진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자유에 대한 사전적 개념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자유는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행복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지라도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행복을 느끼지 못한 자는 또한 자유할 수 없다. 주어진 같은 시간대를 살지라도 늘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주할지라도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인간에게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자유를 사용할 수 없다면 자유한만큼 인간은 불행해지게 된다. 유럽 중세기에 흑사병이 발병하게 된다. 1347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에서 발생한 흑사병이 아테네를 거쳐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급속도로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당시 유럽 인구를 9천만 명으로 추산했을 때 흑사병은 사망한 사람은 5천만 명이나 된다. 유럽인구 절반이 3년간 발병한 흑사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자유와 행복을 추구했던 유럽의 풍요로움과 자유분방한 삶은 죽음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선 자유도 행복도 의미가 없게 된다. 자유를 유린 당하여 행복하지 못할지라도 살아 있기만을 사모하게 된다. 물론 살아 있음이 보장되어 죽음을 망각할 때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인구 절반이 원인모를 병원균으로 죽어 가는 시체 앞에서는 자유도 행복도 의미가 없을 것이며 단지 살아남은 것이 최고의 자유이며 행복일 것이다. 맨체스터 국립중앙도서관 Adrift 동상 영국의 중부도시 맨체스터 국립중앙도서관 앞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을 담은 조각상이 있다. 조각가 '존 캐시디'(John Cassidy, 1860 - 1939)에 의해 방황하는(Adrift) 인간이란 주제로 1907년에 제작되었다. 번영되고 안정될수록 인간의 생각은 고뇌에 빠진다. 삶이 힘들고 고난의 늪에서는 생각이 단순해진다. 반면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고 전쟁이 없어서 편안하다고 생각되어질 때 인간은 자유하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고민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일수록 행복지수는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배고플 때는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 하나의 깃발을 향해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었기에 다른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생활이 안정 되면 앞에 놓은 목적의 깃발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고난을 극복한 이후에 좌절을 경험하게 되면서 고난과 가난할 때 받았던 좌절보다 더 강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게도 한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자살률이 높게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조국 대한민국은 OECD에 1996년 29번째로 가입되었다. 현재 OECD 34개의 국가 중 자살률 1위로 대한민국이 불명예를 차지했다. 일본이 2위, 영국은 8위다. 옛 어른들은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자살할까 하며 혀를 찬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다. 그것은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심성은 피폐해진다는 사실이다. 가난했을 때는 대문을 걸지 않아도 되었다. 훔쳐갈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석학으로 으뜸이 되는 세계적 도시인 옥스퍼드의 거리를 걷다 보면 군데군데 자전거가 밀집해 세워져 있다. 세워진 자전거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물쇠가 하나가 아니라 자전거를 아예 칭칭 감아 놓은 것도 있다. 그것도 부족하여 안장을 빼서 가방에 넣고 다닌다. 지성의 도시가 왜 그리 인간의 본질적으로 가져야 할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 배려함을 상실했을까 생각하게 하지만 이유는 간단한 것이다. 관광객이 많아서가 아닐 것이다. 문명의 발전이 가져온 어둠의 그림자일 뿐이다. 인류는 편리한 문명의 숲에서 인간 본질을 잃고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 문명의 숲에서 길을 잃는 방황하는 인간들이 찾아야 할 것은 세상에 숨겨진 성공의 무지개가 아니라 내면에 감추어진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내는 보화일 것이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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