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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보는 유럽연합은 ‘무지렁이’

     1991년 1월 말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을 격퇴하였다. 당시 유럽공동체(EC) 12개 회원국들은 다국적군의 이라크 침공 직전까지 유엔(UN)을 통해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면서 EC차원에서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실시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하나로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했고 영국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앞세우며 양국 공조를 우선시했다. 이런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던 EC의 한 관료는 “EC는 경제적 거인, 정치적 난장이, 군사적 무지렁이(economic giant, political dwarf, military worm)이라는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18년이 지난 현재, 국제무대에서 유럽연합(EU)의 입지는 어떨까? 미국이나 러시아는 EU를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있는 주요 행위자(actor)로 보고 있을까? EU는 각 종 선언이나 발표문을 통해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을 이룩하고 정치와 외교분야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면서 활동해 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까? 현실에 맞는 말일까? 아니면 현실에 맞지 않는 자기위안일 뿐일까? 최근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가 EU를 바라보는 시각을 분석해 관심을 끌었다.

                         “EU는 전략부재와 거시적 관점 부족”
     러시아의 싱크탱크인 Polity Foundation의 뱌체슬라프 니코노프(Vyacheslav Nikonov) 소장은 EU 27개국이 초강대국(superpower)이 되는데 방해하는 요인으로 세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우선 전략적 깊이(사고)가 부족하다. 이어 천연자원의 부족, 그리고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은 EU 집행위원회 호세 바로수 집행위원장이 지난 6일 러시아를 방문해 상호관심사를 논의하는 시점에서 나와 관심을 끌었다.
     니코노프는 이런 점 때문에 1998년 러시아지도부는 EU 가입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했으나 별로 실익이 없어 더 이상 이런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보기에 EU가 너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이었다는 것. 즉 규제가 너무 많고 사회복지가 너무 잘 되어 있으며 세율이 높았다는 것. 냉전붕괴이후 러시아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서 아직도 시장경제로 이행중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보기에 EU가 너무 사회주의 사회 같다고 하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미국의 친시장주의자가 EU를 볼 때 러시아인보다 훨씬 더 사회주의 사회라고 볼 것이 자명하다.
     어쨌든 니코노프는 러시아가 이런 EU의 결점을 다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석유와 가스 등 지하자원 매장량이 엄청나다. 핵무기 보유국이며 전략수송기를 보유하고 있어 전세계 어디에나 군을 투입할 수가 있다. 냉전시기 미국과 자웅을 겨루며 양극체제(bipolar system)를 구성했다가 냉전붕괴로 러시아는 이런 위치에서 하락했으나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자국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나 혹은 미국이 최대의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중국이 생각하는 러시아의 입지보다 과장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러시아 지도부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외교정책을 짜고 실행한다는 것. 지난해 8월 그루지아를 침공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산 것도 이런 외교정책의 결과이다.
              
                             EU의 러시아 짝사랑과 EU내 갈등
     러시아 지도층의 이러한 시각은 러시아와 전략적 관계를 맺으려 노력해온 EU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다. 엄청난 경제적 원조를 미끼로 ‘북극 곰’을 껴안으려 하나 곰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EU 회원국 상당수가 석유와 가스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겨울이면 EU 회원국들은 가스공급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 가스는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독일이나 프랑스 등 EU회원국에 공급된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가스대금을 제대로 결제하지 않았다며 지난 1월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공급을 며칠간 중단했다.
     EU 27개 회원국들도 EU차원에서 공동에너지정책을 실시해 러시아에 대해 한 목소리로 협상하고 정책을 취하면 훨씬 이득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공동에너지정책은 지난 70년대 석유파동이 있었을 때 거론된 후 수십년간 말로만 있을 뿐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석유와 가스등 지하자원을 무기로 힘을 투사하고 있다. 10년전만해도 러시아는 자신을 ‘서구’(west)의 일원으로 여기며 EU나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성을 보였다. 물론 1998년 러시아 경제는 망가져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지원조건에 합의하지 못해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던 러시아가 21세기 들어 석유와 가스 등 지하자원 가격의 고공행진으로 이를 무기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EU내 대러시아 정책도 크게 친러파와 반러파로 나뉘어진다. 과거 소련의 압제에서 신음했다가 지난 2004년 EU에 가입한 폴란드와 체코 등 중동부 유럽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해 강경정책을 주문한다. 폴란드와 체코가 러시아의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기지를 자국에 건설하겠다고 나선것도 이런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에 독일이나 프랑스는 대개 러시아를 적극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반된 시각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EU내 대러시아 정책 합의가 쉽지 않다.  


                            EU와 러시아 접점은 어디에?
     국제무대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EU(러시아의 EU시각), 러시아가 지닌 핵무기와 지하자원, 그리고 러시아 정정불안시 발생할 대규모 난민과 환경재난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러시아를 포용해야 하는 EU. 과연 이러한 시각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릴까? 아니면 어디선가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한 시나리오는 러시아 경제의 쇠락이다. 고공행진을 계속하던 유가 덕분에 러시아 경제를 지난 몇 년간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이제 글로벌 경기침체로 석유와 가스 가격이 최소한 몇 년간 하락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여 러시아 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군은 지난해 8월 그루지야 침공에서 값진 교훈을 얻었다. 냉전이후 최신식 무기를 제대로 구입하지 못해 대규모 국방현대화 계획을 추진중이다. 하지만 경기침체로 군 현대와 계획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경기침체가 계속될수록 러시아는 EU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할 것이다. EU는 냉전붕괴이후 러시아의 최대 원조제공자였다.
     어쨌든 EU의 대러시아 짝사랑은 당분간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자국을 강대국으로 여기는 러시아는 자신이 EU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여기며 EU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기에 주력할 것이다.
안 병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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