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릿 대처의 실책 민영화 기업...독과점 형성, 철도는 다시 국유화 되어 점차 오만방자해져 권력의 한계를 넘어
올 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선거가 줄줄이 치러졌거나 예정되어 있다. 당장 22일에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지난달에 대선이 치러졌다. 우리의 경우 지난 11일 총선, 12월에는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선거의 해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리더십이다. 2008년 대선 당시 마가릿 대처 총리의 리더십을 다룬 책이 국내에서 출간되더니 최근에 다시 비슷한 내용의 책이 또 나왔다. 필자는 국내에서 나온 마거릿 대처 관련 책이나 논문이 주로 대처의 업적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실책도 분석하고자 한다. 아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인물 마가릿 대처...대처의 내치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합이 있게 해주시고...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게 해주세요!’ 1979년 5월 4일 영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된 당시 54살의 마거릿 대처는 런던의 다우닝 10번가 관사에서 이처럼 짤막한 취임 소감을 밝혔다. 내리 3번 총선을 이기며 승승장구하던 보수당의 대처 총리는 그러나 1990년 11월 아이러니하게도 보수당에 의해 총리직에서 쫓겨나는 비운의 영웅이 되었다. 보수당의 가장 큰 보물이었던 그가 점차 감당하기에 너무 곤란한 부채가 되면서 표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정당이 당수를 몰아낸 셈이다. 대처가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그의 정책 때문이었다.
그의 정책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처라는 인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사람들도 크게 나뉜다. 필자가 공부할 때 영국인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처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지않이 있었다.
대처정책을 일컫는 대처주의는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줄여 시장의 자율성을 최대화하고 이런 측면에서 철도와 가스, 전기 등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했다. 또 집권 2기였던 1984년 노조와 일년 넘게 걸린 투쟁에서도 원칙을 고집해 승리하였고 여세를 몰아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련의 개혁 입법을 통과시켰다.
대처...냉전 승리에 기여했으나 독일 통일은 반대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대처는 비단 이런 내치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에서도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강화해 냉전의 붕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철의 여인’은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이념적 동지로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였다. 또 그는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전 서방에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미하엘 고르바초프의 가치를 먼저 발견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내렸고 그와의 관계를 서방지도자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밀접하게 유지해 영국의 국익을 관철시키는데 이용했다.
최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자국 영토라고 다시 내세우면서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 전쟁에서도 대처는 승리했다. 올 해로 30주년이 되는 이 전쟁에서 영국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본국에서 1만 여 km 떨어진 곳에 항공모함과 군대를 파견해 싸워야 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불과 수백 km 떨어진 근해에서 싸웠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남미의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당시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아르헨티나 공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영국에 알려줘 영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말 그대로 영국과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처의 업적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실책이나 한계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민영화한 철도나 가스, 전기 분야가 또 다른 민간 기업의 독과점을 초래했다. 민영화 후 이 분야의 요금은 올랐지만 서비스의 품질 등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철도는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에 사실상 ‘재국유화’하는 길을 걸었다.
또 3선의 승리에 도취해 대처는 오만방자해졌다. ‘나 아니면 이런 개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하며 지방세(council tax)를 대폭 올렸다. 그러나 이 정책은 과세의 형평성을 제고한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보수당 지지층이었던 중산층을 보수당에서 등을 돌리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대처의 몰락에 기여했다. 대처는 이밖에 독일 통일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인 변화를 너무나 냉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반대하는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통일 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조건으로 독일 통일을 적극 지지했지만 대처는 통일 독일의 강대국화를 우려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물론 당시 영국 외무부는 대처가 공개적으로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것을 매우 우려해 내부적으로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나름대로 지지했다.
잡화상 출신의 딸인 대처는 당시 보수당 내에서는 국외자였다. 당시 보수당의 지도부는 상당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국외자였던 철의 여인은 이런 보수당에 들어가 당의 개혁과 그 당시 영국 사회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런 쉽지 않은 일을 감행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기에 우리는 대처의 리더십에 매혹된다. 그러나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민의를 무시하고 권력의 한계를 넘으면서 그는 좌초했다. 12월의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 대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역할 모델이자 반면교사 상을 제시해준다. 단순히 대처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분명히 그의 한계도 있었다.
안 병 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