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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3 21:12
유럽통합 50주년과 동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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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5일은 유럽통합의 출발점이 된 로마조약이 서명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올 상반기 유럽이사회 (회원국 정부와 국가수반의 모임)와 각료이사회 (회원국 장관들의 모임) 순회의장국인 독일은 이날 베를린에서 대규모 축하행사를 개최한다. 각 회원국에서도 지천명이 된 유럽통합을 축하하는 다양한 행사가 연중 열리고 있다. 1957년의 로마조약을 출발점으로 회원국들은 경제통합을 수단으로 정치와 외교, 안보 등 각 분야에서도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올해 1월1일 발칸반도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유럽연합 (EU) 신규 회원국이 됨으로써 EU는 현재 4억8천8백만명이 넘는 인구에 세계 총생산의 21%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이 되었다. 그러나 통합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2005년 부결된 헌법조약의 처리와 회원국의 확대문제 등 여러가지 도전에 직면해있다. 유럽통합의 경험이 동북아에 주는 교훈을 한번 정리해보자. 점진적인 통합과 통합분야의 확대 우선, 경제를 수단으로 통합을 가속화하면서 정치와 사법.내무 분야까지 점진적으로 통합분야를 확대한 점을 들 수 있다. 2차대전이후 당시 서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다시는 1,2차 대전과 같은 전쟁의 참화를 겪어서는 안된다는 자각아래 전쟁을 방지하자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석탄과 철강을 공동관리하기 시작했다. 석탄과 철강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자원이다.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는 석탄과 철강이 풍부했고 독일은 이를 무기로 1,2차 대전을 일으켰다. 따라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필수 자원인 석탄과 철강을 한 나라가 아니라 서유럽의 여러나라들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이 1950년 5월9일 슈망선언을 통해 독일과 프랑스 석탄의 공동관리를 주창했고 참여를 희망하는 다른 회원국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일년여의 협상과정을 거쳐 1951년 프랑스와 독일, 베네룩스3국, 이탈리아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설립하는 파리조약에 서명했다. 해마다 5월9일은 ‘유럽의 날’이라고 해서 유럽연합 차원에서 축하행사를 개최한다. 바로 유럽통합의 출발점인 ECSC 출범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통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통합과정을 이끌어왔다. 독일은 2차대전이후 국토가 분단되었고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서방점령국으로부터 나치잔재 청산을 강요받았다. 따라서 독일에게 유럽통합은 하나의 구세주 같았다. 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서방점령국에게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사회에서 신뢰할만한 국가임을 인정받았다. 또 통합의 진전으로 각 종 무역장벽이 철폐되자 수출대국인 독일은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가운데 최대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반면에 프랑스는 2차대전이후 식민지를 잃고 국제무대에서 중진국으로 전락했다.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프랑스가 국제무대에서 최소한 강대국의 흉내라도 낼려면 서유럽에서 지도자임을 보여주어야 했다. 따라서 유럽통합은 프랑스에게 서유럽의 지도자임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었다. 프랑스 혼자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협력이 매우 필요했다. 이런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통합에서 주도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 두 나라는 통합을 확대하자는 제안도 대개 공동으로 제기했고 협상과정에서도 두 나라의 이익을 상당부분 관철했다. 셋째, 미국의 역할이다. 미국은 2차대전이후 소련과 함께 2대 강대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면서 역사적.정치적인 이유로 ‘유럽파워’ (European power)가 되었다.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저지하기위해 서유럽의 단결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따라서 미국은 군사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서유럽에 핵우산을 제공했으며 서유럽의 통합을 적극 지지했다. 물론 1970년대 들어 세계경제가 침체되고 서유럽의 경제발전이 가속화돼 미국과의 무역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최소한 정치적으로 서유럽의 통합을 적극 지지했다. 중국과 일본의 상호적대와 미국의 양자주의 선호 이런 유럽통합의 경험을 동북아와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유럽과 동북아의 역사적.정치적인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과 일본뿐이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부정, 중국의 패권주의 추구정책으로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상대를 가장 큰 적으로 여기고 있어 지도력을 행사할 구조적 요인이 매우 부족하다. 또 미국도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해 떠오르는 중국을 필요에 따라 견제하거나 관여시키는 양면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서유럽에서 미국이 다자주의를 존중했다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정책은 매우 양자주의 우선이다. 따라서 미국의 양자주의 외교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상호적대감을 버리고 관계 제도화를 앞당기지 않는 한, 동북아에서의 협력은 매우 더딘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외교역량 강화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안 병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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