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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09:40
독일이 주도하는 EU... 말만 앞서는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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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주도하는 EU 말만 앞서는 프랑스 ‘이제 독일이 EU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지난달 25일부터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27개 회원국 수반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가 종료된 후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들은 회담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 정부 구제안에 대해 독일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적극적 관여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프랑스 등 일부 회원국들은 IMF가 그리스 지원에 관여할 경우 유로존(유로를 채택한 16개 EU 회원국)의 정책일관성이 문제가 되고 유로존의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이를 뿌리치고 IMF의 관여를 얻어냈다. 그렇다면 독일이 이제야 EU를 좌지우지 할까? 그렇지 않다. 유럽통합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가 ‘독일 문제’(German Question)이었으며 1990년 독일이 통일된 후에도 이 문제는 아직도 상이한 상황에서 계속되고 있다. 드골: 프랑스는 마부, 독일은 말...그러나 현실은?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우리 모두는 드골주의자였고, 드골주의자이며 드골주의자 일 것이다”는 말로 프랑스 역사에서 5공화국 대통령이 차지하는 역할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1958년 당시 프랑스가 알제리 내전을 겪고 있을 때 내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드골은 1968년 프랑스 전역을 휩쓴 학생시위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날 때 까지 10여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프랑스의 독립과 주권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위대한 프랑스 구현을 위해 노력한 그의 사상과 원칙을 보통 드골주의(Gaullism)라고 부른다. 알제리 내전을 해결한 그에게 난제중의 하나의 이웃 서독과의 관계정립이었다. 1차대전 후 프랑스 정부가 실시했던 강경 대독일 보복정책이 실패하면서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했고 2차대전이 유럽전역을 휩쓸었다. 2차대전 종전 후 대서독 정책을 두고 갈등을 겪던 프랑스 정부는 일단 서독을 파트너로 대하면서 서독의 잠재적 침략야욕을 꺾어놓기 위해 전쟁의 필수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으로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가 출범한다. 드골은 서독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고 서독을 ‘손아귀’에 두기 위해 1963년 독불우호조약(‘엘리제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이 주요 외교문제에 대해 상시 협의하고 청소년 교류를 강화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드골은 서독제어에 성공했다고 자신하며 프랑스를 마부, 독일을 말로 비유했다. 마부인 자국이 난폭해질 수도 있는 독일을 고삐로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가렛 대처: “독일이 마부, 프랑스가 오히려 말” 그러나 유럽통합이 진전되면서 프랑스의 입장은 오히려 정반대가 되어 가는 듯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경제력을 앞세우고 유럽통합에 적극적인 서독, 반대로 프랑스의 경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1980년대 말 당시 9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 가운데 서독 경제 비중은 약 1/3정도였다. 1979~1990년까지 영국 총리는 역임한 마가렛 대처 총리는 회고록 ‘다우닝街에서 보낸 시절'(Downing Street Years)에서 독일이 마부이고 프랑스가 오히려 말이라고 말했다.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적극적인 유럽통합 지지론자였지만 유럽이사회에서 종종 자국이 유럽통합을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해왔다고 주장했다는 것. EEC 9개 회원국 가운데 최대 경제대국이고 1980년대 가입한 지중해의 빈국인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위한 지원에 서독이 가장 많은 재정적 부담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독일이 통일되면서 프랑스의 우려는 더욱 더 커졌다. 분단국이어 유럽통합에 적극적이던 서독이지만 통일 후에는 일방주의 혹은 유럽통합에 적극적이지 않겠지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콜 총리는 이런 우려를 잠재웠다. 통일 후 독일의 외교정책은 분명히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가 있었다. 1,2차 대전의 업보에 그리 많이 구애받지 않고 때로 일방주이 외교정책도 실시했다. 2000년 12월 유럽이사회 순회의장국이던 프랑스는 니스에서 유럽이사회를 열고 조약개정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당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각 국이 인구비례로 보유중인 가중다수결(Qualified Majority Voting: QMV)에서 자국이 최대 투표수를 가져야 한다고 강력 요구했다. 인구 8천2백만명인 독일과 6천만명 남짓한 프랑스가 동등한 가중다수결 표를 보유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소리였다.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몹시 당황했다. 2차대전 종결후 프랑스가 자존심을 걸고 지켰던 외견상 독일과의 동등한 입장유지가 깨질 순간이었다. 많은 논란 끝에 QMV를 동등하게 유지하는 대신 유럽의회 내 독일의원을 수를 더 늘려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처럼 유럽통합을 이끄는 독일의 역할은 이전부터 있었고 표현양식은 약간씩 상이했다. 그러나 이번 그리스 재정위기를 둘러싼 해법과정은 독일의 역할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이에 반비례해 왜소해진 프랑스의 모습도 그대로 드러났다. 안병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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