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이름의 산

이제 두 주가 지나면 ‘서른 즈음에’가 시작된 지 어느덧 1주년이 된다. 지난 1년간 부족하기만한 필자의 글을 통해 나누었던 수 많은 이야기들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의 마음 그 곳에 과연 어떤 빛깔의 낙옆이 되어 쌓여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올해의 마지막 이야기 두 편을 남겨놓고 ‘서른 즈음에’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면서, 2007년의 마지막 두 편의 이야기는 필자의 부모님께 헌정하려 한다. 아마도 누구나 서른 즈음이 되어 세상을 알면 알수록, 삶이라는 여행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새삼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절대적으로 존귀한 가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필자 개인적인 이야기임과 동시에, 또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이의 가슴 깊은 그곳에 영원토록 가장 큰 울림으로 자리하고 있을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 그리고 사랑을 전한다.

서른 즈음이 되고, 세상과 부딪히며 한 남자로, 한 사회인으로 새로운 성장을 거치면서 언제부턴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필자의 아버지가 어떤 질병이나 아니면 극도의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살았거나 하는 데서 오는 성격의 눈물은 결코 아니다. 그저 지난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그리고 자식을 위해 삶의 순간 순간마다 필요했던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헌신해준 거대한 산과 같은 아버지의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경외감과 존경이 흘러 나오는 까닭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체육 선생님이다, 그것도 한 학교에서 무려 30년을 한결같이 근무하신 까닭에 얼마 전에는 30년 근속 감사패도 수여 받으셨다고 한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세태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건만,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실히 같은 자리를 지켜오신 그 우직한 모습에서 이 세상 어떤 금전이나 명예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삶의 진한 향기가 우러난다. 요즘에는 교사라고하면 얄미운 철밥통 추종자마냥 비쳐지고, 특히 체육 교사의 경우 공이나 던져주고 체육실에 짱박혀 시간이나 때우는 부류로 비춰지기 십상이지만, 필자의 아버지만큼은 자신하건대 이 세상에 몇 남지 않은 진짜 선생님, 그것도 더우나 추우나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뛰기를 즐겨 하는 진짜 체육 선생님이다. 어떻게 아냐고? 필자의 아버지가 근무하고 계시는 학교 재단(유치원 및 초중고교가 한 자리에 있는)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닌 까닭에 방과 후면 대운동장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수차례 목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단순히 직업 삼아 체육 교사가 된 이들에게야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체육 시간이 싫을 만도 하지만, 진짜 운동이 좋아서 당신 스스로 하루에 운동장을 몇 십 바퀴씩 뛰시고, 그것도 모자라 퇴근 후 따로 운동을 해오시기를 수십 년째인 필자의 아버지로서는 학생들과 함께 땀흘리며 운동하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셨으리라.

아주 어린 시절 언젠가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들어오셔서 하신 얘기가 기억난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한 남학생이 너무 불쌍해서 직접 돈을 주고 목욕탕에 갔다오라 했더니 샤워만 하고 왔기에 당신이 직접 그 학생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때를 밀어 줬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지금도 수십 년 전 제자들이 스승의 날이면 아버지를 찾아와 술잔을 주고 받는 모습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자신의 길을 그 누구보다 진실되게 걸어온 한 멋진 남자의 인생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때로는 미련하리만치 우직하고 성실한, 정도(正道)를 벗어날 줄 모르고 남한테 조그만 피해도 주기 싫어서 차라리 본인이 손해보는 길을 택하는. 대충해도 될 것 같은, 조금 편하게, 조금 즐겁게 해도 될 것 같은데도 그러면 당신 마음이 불편해서 그 작은 잔꾀나 편법을 용납하지 못하는. 한때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미련해 보이고, 남들처럼 재테크나 온갖 편법을 동원해 불로소득을 올려 부자가 될 생각은 안하시고, 그저 하루 하루 맡은 일만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답답해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면서 진짜 세상이 어떤 곳인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아니 더 정확히는 어떻게 부자처럼 보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비록 많이 갖고, 높이 있는 자들도 참된 정신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는 이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필자를 보고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그 음악적 재능(솔직히 재능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지만)은 어디서 온 것이냐고. 아버지로부터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앨범을 우연히 보다가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들과 소풍을 가셔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다. 필자는 고작 기타와 하모니카밖에 못하건만, 아버지는 건반도 치시고 톱으로 바이올린 소리를 내는 연주도 하신다. 물론, 노래는 정말 잘하셔서 한번은 친척들이 성민이가 아무리 노래를 해도 지 애비만큼은 절대 못한다라고 하는 바람에 풀이 죽은 적이 있을 정도다.

아버지와 노래방에서 같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조영남의 ‘내 고향 충청도’라는 노래다. 가사에 보면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 싶은 곳’이라는 부분이 있다. 자식이라고는 못난 필자 한 명 둔 까닭에 이 노래는 바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되어 필자가 갓난 시절에도 아버지는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와 소주잔을 주고 받은지 어느덧 2년하고도 3개월이 지났다. 내 힘으로 생활하고, 내 힘으로 비행기표를 마련할 때까지 기다렸던 역시 미련한 고집이었건만 그래도 마음만은 한없이 힘차다. 군 복무 시절 휴가 때 소주잔을 채워 주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과연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걱정이 되셨던지, 세상은 정말 쉽지 않다라는, 그리고 그 험한 세상에서  부모님만이 끝까지 내 편이 되 줄 것이라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정신적 가치를 발판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험한 세상에서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보여드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1999년 2월, 아버지와 단둘이 떠났던 훈련소 입소날, 군악대가 연주하는 소양강 처녀가 울려 퍼지고 눈발이 흩날리던 가운데 마지막 발걸음을 떼던 순간,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으면서 지난 30년간 아버지라는 이름의 거대한 산이 내게 준 그 어마어마한 선물들이 떠올라 쉴새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