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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5 13:33
12년 전 광화문의 봄 햇살
조회 수 2013 추천 수 0 댓글 0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것은 2001년 4월 3일, 한 달 동안 민간인이 된 기쁨을 마음껏 만끽한 뒤에 5월부터는 종로 3가에 있는 영어회화 학원과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3호선 지하철을 타면 일산에서 종로 3가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나는 답답한 지하철이 싫어서 일산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내려서 종로 3가까지 걸어다녔다. 내가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점심시간 무렵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주변을 기웃거리며 혼자 점심도 사먹고 종로까지 걸어가며 이런 저런 구경을 하는 게 참 재미있었다. 대학 2학년까지 다닌 뒤 군 복무까지 마친 당시의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참 많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대학 전공에 대해 그닥 흥미를 느낀 것도 아니었고, 대학 졸업 후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도무지 아무런 감이 잡히지 않았다. 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운 어느 날 오후 여느 때와 같이 광화문 지하도를 걷던 중 막 잠에서 깨어난 노숙인을 목격하게 되었다. 늘 다니는 지하도여서 그 노숙인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다른 노숙인들과는 달리 그 분은 나름대로 묘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분이었다. 유난히 긴 머리에 긴 수염을 가진 그가 지하도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신문을 덮고 늘어지게 잠을 자던 모습을 이전에도 몇 차례 봤었다. 그 날 역시 그렇게 늘어지게 자다가 따사로운 오후에 일어나서는 햇빛이 들어오는 지하도 출구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털썩 주저앉아 본인이 덮고 자던 신문을 펼쳐 읽으면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문득 그 노숙인이 마치 세상만사를 달관한 무슨 도사처럼 보이면서, 심지어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 고민 없이, 아무 욕심 없이, 그저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그의 자유로움이. 그는 어쩌면 늘 아둥바둥 지지고 볶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노숙인으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곱씹으며 샌드위치를 사서 광화문 교보문고 옆 벤치광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침 회사들도 점심 시간인지 근처는 온통 점심 식사를 하러 나온 회사원들. 나처럼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사서 벤치광장에서 점심을 먹는 회사원들도 많았다. 광화문 근처 대형빌딩에서 근무하고 있을 그 회사원들을 바라보니 또 그들이 부러워졌다. 나 역시 지금은 런던 시내 한복판의 42층 건물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대형빌딩들을 바라보며 “저런 곳에서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대기업 회사원들이 그렇게 대단해 보였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20대 초반의 나는 과연 내가 나중에 제대로 앞가림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책임질 만큼 돈을 벌 수 있을지,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지, 그 모든 미래가 너무나도 막연하고 두렵기만 했다. 대부분 비슷한 헤어스타일에 비슷한 옷차림, 심지어 얼굴까지 비슷해보이는 그 회사원들을 바라보며, 나 역시 그렇게 평범한 회사원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 길 밖에는 없는 것인지, 그게 정말 행복한 것인지, 수 많은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건너편 벤치에 앉은 한 회사원이 들고온 샌드위치를 다 먹고서 신문을 펼쳐들었는데, 그가 펼쳐든 신문을 바라보니 마침 삼촌(해바라기)의 콘서트 광고가 보였다.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해바라기 콘서트 ‘숲속의 음악회’. 나중에 삼촌이 초대해주셔서 직접 관람했던 공연이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저 회사원의 삶도 부럽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일상에 찌든 직장인들에게 음악을 통해 단비와도 같은 휴식을 선사할 수 있는 삼촌이 더 부럽다는. 아무리 잘 나가는 직장인들도 결국 고단한 일상의 피로를 달래기 위한 그 무언가가 필요한데, 내가 그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로부터 어느덧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지금 이렇게 헤드헌터가 되어 런던에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서 대형빌딩에서 회사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비록 유명하거나 큰 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음악인으로서 틈틈이 기타를 연주하러 다니고 있다. 지난 화요일에는 내가 활동하는 가야금&기타 듀오 KAYA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주할 일이 생겨서 회사 휴가를 내고서 1박 2일로 연주 여행을 다녀왔다. 난생 처음 가보는 파리였는데 이미 조만간 보름 휴가를 떠나는 지라 그에 앞서 또 긴 휴가를 낼 수가 없어서 하루반만 휴가를 내고서, 화요일 저녁에 연주를 마친 뒤에 개선문과 에필탑만 구경하고는 다음 날 오전 일찍 부랴부랴 런던으로 돌아와서 오후에는 회사에 출근했다. 하루 사이에 음악인과 회사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문득 12년 전 광화문의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미래를 그려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회사원도 부럽지만, 숲속의 음악회를 여는 삼촌이 더 부러웠던 나는 결국 이렇게 회사원이면서 음악도 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어찌 하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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