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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종종 영어 단어로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100%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의리’라는 단어가 바로 그렇다. 어떤 영어 단어나 표현으로도
우리가 사용하는 ‘의리’의 뜻과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의리(義理):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한다. 참 좋은 말이다, 특히 ‘바른’ 도리.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는 이 ‘의리’라는 멋진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 같다. 분명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는데, ‘바르지 못한’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 때문이다. ‘바르지 못한’ 도리라는 게 별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자격과 능력만 봤을 때는 그 사람에게 그런 기회 혹은 그런 특혜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오직 그 사람과의 이해 관계 때문에 그 사람에게 그런 기회와 특혜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르지 못한 도리며 잘못된 의리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가면서 해야 한다.
특히, 그것이 철저히 합리적이고 공정해야 하는 공적인 사안이라면 그런 잘못된 의리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이번 정권의 탄생에 나름대로 일조한 재미교포 출신의 연예인이 국가 공공기관의 감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단순히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가의 공공기관, 그 중에서도 감사라는 자리는 그 분야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자리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를 봐서 나이 80세가
다 된 재미교포 연예인이 이 자리에 적합한 것일까?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그저 한 때 심야 토크쇼에서 재미난 입담을 뽐내던 진행자였던 그가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국가
공공기관의 업무를 공부하고 감사 실무 경력을 쌓아서 어느새 이 분야의 숨은 인재라도 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그가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통해 감사라는 게 어떤 일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을 보면 그건 아닌 듯 싶고, 결국 그 일과 아무런 상관도, 자격도 없는 사람을 그 자리에 억지로 앉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가 현 정권의 탄생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그에게 그런 기회, 아니 특혜가
주어졌을까? 결국, 이 역시 이해 관계에 따른 바르지 못한 도리이자,
잘못된 의리의 전형인 셈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비상식적인 결정을 내리면서까지 그와의 의리를 지키려 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진짜 의리가
아니다. 그를 이 자리에 임명한 사람도, 그리고 그렇게 임명되었다고
넙죽 받아들인 당사자에게도 결국은 독이 되는 의리다. 그를 이 자리에 임명한 사람은 그래도 국가 공공기관의 중책인데 자격도 없는 사람을 오직 의리 하나로 임명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며, 이를 받아들인 당사자는 그래도 한 때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추억 속의 연예인에서 이제는 성난 민심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었다, ‘정의의 반대말은 의리’라는.
어떻게 보면 섬뜩할 만큼 맞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사법제도에 의해 엄벌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가벼운 처벌만 받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 당사자들은
백발백중 한국 사회에서 알아주는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이다. 얽히고 설킨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의리가 작용한 것인데, 그야말로 정의와 반대되는 의리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된 의리는 꼭 그렇게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소는 인맥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 수 없이 다양한 관계로 얽혀있는 이 인맥에 어떤 식으로든 속하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우리 모두는 나와 관계 있는 누군가와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야말로 의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혼자서 외딴 산 속에 살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인맥과 의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나의 유익과 이해 관계 때문에 누군가를 도와주고 누군가의 잘못을 모른 척 하거나 심지어 미화시킨
적도 있고, 또 그 대가로 도움을 받고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익이 될 것
같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트고 싶었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어서 노력했다. 그것이 비록 앞서 언급한 국가 공공기관의 중책에 임명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커다란 일이 아니었을 뿐, 나 또한 나의
삶의 영역에서 그렇게 잘못된 의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그렇다면 과연 진짜 의리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의와 평등을
헤치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이루어지는,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제 3자들이
봐도 바람직한,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간의 바른 도리’,
그 정도쯤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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