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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01:44
우리 집을 방문한 토순이
조회 수 2742 추천 수 0 댓글 0
지난 일요일 오후, 운동을 가려고 대문 밖을 나섰는데 집 앞에 왠 토끼 한 마리가 깡총거리고 있었다.
영국도 시골에 가면 들토끼를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는데, 여기는 시골도 아니고 더구나
이 토끼는 아무리 봐도 때깔이 너무 고운 게 들토끼가 아니었다. 생긴 것도 너무나 귀엽고 착하게 생긴 녀석이 도대체 왜 여기서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싶어서 토끼를 계속 관찰해보니
아뿔사 차도 쪽으로 가더니 내 차 밑으로 들어간다. 만약 타이밍이 어긋나서 토끼가 내 차 밑으로 들어간 사이에 내가 나와서 차 시동을
걸었더라면 하는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다행히 이 녀석도 차 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다시 기어나왔는데 아무래도 그냥 저렇게 두다가는 교통사고를
당할 것처럼 보였다. 주인이 있는 토끼든 아니든 이 토끼를 당장은 내가 보호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토끼를 열심히 몰아서 우리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야말로 우리 집을 깜짝 방문한 토끼, 우리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끼를 위해 박스로 집도 만들고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서 토끼의 습성과 먹성을 열심히 공부했다. 처음에는 다소 경계심을 보였던 토끼는 당근과 샐러드를 미친 듯이 먹어대더니 또 미친 듯이 똥을 쌌다.
그런데, 이 토끼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사람에게
다가와서 애교를 떤다. 나는 토끼를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고 토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들토끼가 이렇게 사람과 친근할 수가 없다. 분명 누군가가 버렸거나 아니면 잃어버린
토끼일텐데, 그렇다고 근처 모든 집들을 찾아다니며 토끼 주인을 찾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가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이 동네 동물병원 웹사이트에 토끼 사진과 토끼를 보호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혹시 그렇게
해서 토끼 주인에게 소식이 닿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토끼 주인이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 토끼를 우리 집에서 키웠으면 하는 마음이 속으로는 더 강했다. 형제 하나 없이 너무나 외로웠던 어린 시절,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소원이 있었다,
동생이 생기는 것, 강아지를 키우는 것, 그리고
비디오. 어떻게 보면 모두 나의 지독했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소원들이었다. 나는 새해가 되면 늘 이것들을 들어달라고 어머니를 괴롭히다가 결국 혼이 나서 눈물을 질질 짜곤 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소원들 중 비디오 하나만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결국 포기해야 했으며,
나는 사춘기를 지나며 고독의 극한을 넘어 외로움을 즐기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어서
더 이상 동생이나 강아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아지를 키워보는 것은 지금도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인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집안에 동물을 들여놓고 나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다는 꿈이 다시 떠오르면서 너무나
귀엽게 생긴 이 녀석이 그냥 나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 것이었다. 길 잃고 배회하고 있던 이 녀석을
내가 딱 발견한 것도 그렇고, 괜히 이 녀석과 나는 어떤 운명처럼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그날 저녁 교회에 갈 일이 생겨서 외출을 해야 했는데, 나는 이 녀석이 새로운 환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나 않을까 싶어서 이 녀석을 위해 음악까지 틀어놓고 나왔다, 자연의 소리가 담긴 차분한 음악을. 교회에서 우연히 옆 집에 사시는 분을 마주쳤는데, 혹시나 해서 근처에 토끼 키우는 이웃이 있냐고 여쭤봤더니
이 분이 놀라시면서 “어! 그거 우리 토끼인 것 같은데!”하시는 것이었다. 사진까지 보여주니 정말 맞다고 하신다. 토끼를 강아지처럼 집 안에 들이기도 하고 마당에 풀어놓기도 해서 없어진 것을 모르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그날 밤 토끼는 다시 주인의 품을 찾아갔고 나는 괜한 서운함을 느껴야 했다.
토끼를 돌려드리면서 들어보니 이 토끼는 암컷이고 이제 몇 개월밖에 안 된 아기 토끼라고 하신다. 그리고, 토끼의 이름은 토순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토순이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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