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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정지영 감독은 이제껏 소개했던 감독들에 비해 그다지 많은 화제작을 연출한 감독은 아니다. 작품성으로 상당한 반응을 얻었거나 대박 흥행작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몇 편의 작품들은 정지영 감독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치밀한 연출력과 작가 의식, 그리고 영화 언어의 절묘한 활용이 극대화된 걸작들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와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한 정지영 감독은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촬영장에서 직접 경험을 쌓았다. 정지영 감독은 70년대에 조감독으로 두 편의 영화에 참여한 뒤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라는 작품으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당시만 해도 우리 영화계에서 흔치 않았던 스릴러를 가미한 작품이었으며, 당시 커다란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에서 선보인 정지영 감독의 시도는 훗날 ‘블랙잭’과 같은 작품을 통해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감독으로 데뷔하지만 정지영 감독이 80년대에 연출한 작품들은 사실 이렇다할 좋은 작품들이 없었다. 이 시기에는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와 같은 사회 의식이 강한 감독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라 드라마적인 연출에 강했던 정지영 감독으로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 같다. 1987년 작인 ‘위기의 여자’ 같은 작품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라는 대배우들을 깅요했음에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MBC 주간극 ‘암행어사’, ‘박순경’, 그리고 수십 편의 베스트셀러 극장을 연출하면서 TV 분야에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정지영 감독의 진가를 발휘한 작품이 바로 1990년 작 ‘남부군’. 이 작품은 6.25 후반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빨치산을 소재로 했으며, 실존했던 빨치산이었던 이태의 수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여전히 색깔론이 팽배했던 당시 사회에서 빨치산의 시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과연 이념이란 무엇인가, 그 이념으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인간의 존재는 어떠한 것인가라는 주제 의식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지리산의 장대한 풍경을 훌륭한 영상으로 담아냈다. 주인공 이태 역의 안성기가 좋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으며, 이혜영의 연기, 터프하지 않은 최민수의 모습, 무명의 최진실과 임창정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 해 청룡 영화제 감독상, 남우주연, 남우조연 및 기타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91년에는 비구승과 비구니의 이야기를 통해 수도의 길에서 겪는 인간의 번민을 다룬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를 연출, 동경 영화제 본선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92년 연출한  ‘하얀 전쟁’은 결국 동경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안정효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본 작품은 월남전의 후유증을 다루고 있으며, 안성기와 이경영이 선보이는 뛰어난 연기, 그리고 치밀한 영상 등 정지영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었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외국 작품들은 여럿 있었지만, 우리 나라의 시위 현장에서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는 장면은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안정효의 소설과 자신의 영화세계가 잘 맞는다고 판단했던지, 차기작 역시 안정효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94년 작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영화를 사랑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독고영재, 최민수, 홍경인, 김정현 등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던 작품. 비록 흥행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산 세바스찬 영화제 국제 영화 평론가상, 제31회 한국 백상예술대상, 제15회 청룡영화상 대상, 1994년 좋은 영화상 등을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정지영 감독의 작품들은 1997년에 연출한 스릴러 ‘블랙잭’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가 이전에 보여준 연출력을 떠올리면 실망스러운 작품들 뿐이었다. 정지영 감독이 선보인 훌륭한 극의 구성과 진행, 탄탄한 내러티브와 영상은 더 이상 그의 연출작을 볼 수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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