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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20:07
<문화현장/ 영국 사람들의 이야기 1>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보고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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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본느의 장례식에서> 1. 일요일 오후, 프란세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본느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다고 그녀는 전한다. 목요일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으로 옮겨 오늘(일요일) 수술을 받는다고 프란세스는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웃의 소식을 먼 웨일즈로부터 전해 받는다. 그녀는 언제 이본느를 만났느냐고 묻는다. 지난 주 일요일에 나는 이본느를 교회에서 만났고 그 때는 심각하게 보이지 않았다고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나는 그녀에게 병원의 전화번호를 받아 놓고 다시 마이클과 이본느의 집으로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는다. 월요일 점심을 먹고 병원을 방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면회가 가능한가 담당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먼저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한다. 다시 이본느의 남편의 알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고 그와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술을 하고 이본느는 1시간 전에 사망을 했다는 부음을 듣는다. 2. 착잡한 심정으로 오후와 저녁 시간을 보낸다. 아쉬움과 슬픔으로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긴 사색에 나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지난 10 여 년간의 삶에서 마치 인드라 망의 그물코처럼 내 인간관계의 망의 한 중심에 있었다. 이본느를 통하여 프란세스를 만나고 닥터 파올 부부를 만났다. 그리고 마이클과 크리스틴도 그렇고 우리 교회의 인도자인 목사인 알란박사는 물론 이본느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녀와 나는 썩 친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린 많은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곤 하였다. 또 나는 그녀의 삶으로 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녀는 내게 몸으로 가르쳐준 반어(反語)법적 스승이기도 했다. 3. 월요일 아침, 운동과 산책을 마친 후 바로 알란의 집으로 나는 출발했다. 걷기로 하고 숲과 학교를 지나는 호젓한 길을 30여 분 걷는다. 숲을 걸으며 한국 사람의 유모어중 마누라가 죽으면 혼자서 화장실 가서도 웃는다고 하는데, 알란도 아마 속으로 웃었을 수도 있겠다는 잔망스러운 생각을 하며 나는 걷는다. 알란의 집에 도착해 문 앞에 서성이고 있는 피터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슬픔이 그득하다. 이본느의 죽음은 실상 남편인 알란 보다 피터가 더 컷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피터는 20여 년간 이본느를 개인적으로 뒷바라지 하며 마치 집사처럼 돌보아왔다. 그래 일부에선 혹시 무슨 특별한 관계가 아닌가 오해를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피터와 이본느는 20여 년 이상의 연령의 갭도 있지만 이본느의 건강과 몸은 여자로서의 기능을 포기할 정도였고 이본느의 정신과 영혼은 또 소녀 같이 맑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피터가 평소에 이본느에게 붙어 돌보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느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40대 초로 아주 넉넉한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나 20여 년 전인 20 대 초에 자기의 사생활을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이본느와 교회를 돌보고 있는 신비스런 사내이다. 사실 알란이나 이본느 보다는 나는 이 피터의 순수함과 아름다움 영혼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본느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나는 피터에게 위로를 해주고 집 안으로 들어가 알란을 만난다. 4. 알란에게 다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우린 앉아 지난 몇 가지의 일과 한국의 장례 풍습과 상가의 흥청한 분위기에 대해서 싱거운 말을 주고받는다. 다시 그들의 큰 딸인 '리사'와 그녀의 친구가 방문했다. 이본느는 세 남매를 입양했다. 담임하는 교회 근처에 사는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고 본인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나는 피터에게 이본느가 저술 작업을 그동안 한 것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런던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후에 다시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미디어와 여러 가지 인문학을 평생 동안 공부한 지식욕이 많은 여인이었다. 간간이 내게 자기의 저술 주제를 털어 놓곤 했다. 그래 나는 피터에게 물은 것이다. 피터는 아주 많은 아이디어와 소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없다고 말한다. 몇 년 간만 더 살았다면, 이라고 아쉬움을 표하는 피터의 말에 공감을 하며 나는 수양딸인 '리사'에게 묻는다. '이본느의 나이가 몇 살이지?'그러나 피터도 리사도 모른다고 한다. 그들이 짐작하는 것은 있으나 고인이 평생 동안 나이를 밝히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한다. 사실 25년간을 함께 알고 지낸 프란세스도 그리고 한 동네 사람인 닥터 파올도 이본느의 나이를 모른다. 피터는 이렇게 사족을 단다. '이본느가 나이를 밝히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나이를 가지고 일정한 사고 작용이나 일정한 행동동기에 대해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 부분에 대해선 나도 그녀의 의견과 생각이 같다. 특히 한국인은 나이를 등식으로 내세워 사고를 하는 바람에 많은 것을 잃고 산다. 5. 한두 시간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귀가 길에 배추 슈퍼에 들려배추 몇 포기와 와인 한 병을 사가지고 돌아온다. 그리고 저녁 몇 잔의 와인을 마시고 나는 소파에서 그대로 잡이 들었다. 그리고 한 밤중에 일어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피터는 이본느가 수많은 아이디어와 소재를 가지고 있으면서 글을 쓰지 않은 이유, 아니 못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 있는 두 단어를 사용했다. 그 중 하나는 블록(Block)이라는 말과 엑스포즈(Expose)라는 두 단어이다. 말 그대로 불록이란 말은 막혀있고 소통을 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또 엑스포즈란 말은 '드러내다', '털어 놓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본느에게 늘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던 것이 결국은 이 두 말이었다. 20여 년간 그녀 곁에서 수발하던 피터도 그녀에게서 이 두 말을 건져 내었다. 그동안 나와 블로그를 통하여 인연을 맺은 독자들은 내가 수없이 강조한 언어 '소통'에 대해서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본느는 서울대보다도 더 좋다는 런던대를 졸업하고 다시 옥스포드를 나오고 그 후로도 수십 년간 공부를 한 여인이었다. 이를테면 지식인이었고 현명한 여인이었다.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전혀 그녀의 재능을 피우지 못했다. 내가 그녀의 삶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바로 그녀는 블록(Block) 되어 있어서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나는 다시 '소통'의 의미를 다시 여러분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진정한 소통이란 자기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대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덜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상대를 위해 자기 자리를 비워 주고 듣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6. 밤 12시 반에 일어나 담담하게 나는 이 글을 쓰고 지금 시각은 1시 반이다. 이렇게 1 시간가량을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으나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못한 기분이다. 결론은 이미 끌어 내놓고 여러분에게 제시했다. 그녀의 삶을 마감한 블록(Block) 엑스포즈(Expose), 이 두 말.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배우지 못한 여인의 안타까운 주검에 나는 다시 소통의 논리를 깨닫고 만다. 소통을 하지 못하면 결국은 막히게 되고 막히게 되면 반드시 부패되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결국은 버려지게 된다. 소통을 하려면 소통을 하기 위한 모든 대상에게 자기의 자리를 비워주고 양보를 하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순서다. 즉 자기 욕심을 버리고 비워주며 양보하는 것에서 소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만약 자연 속에서 자연하고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속세나 현실 일로 채워진 마음 비워야만 가능하다. 당연 사람하고 소통하기 위해선 상대를 위한 자리를 자기 안에 먼저 만들고 그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를 좋아해 그 사람을 마음 안에 넣기 위해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자기 마음의 한 자리를 비워 그 사람의 마음이 고일 수 있게 해야만 된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만큼 자기를 비워낼 수 있고 넓은 마음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은 이상하게도 다른 공간과 달리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마치 우주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각기 다른 자식을 위한 무한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으로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마음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내주고 자리를 비워주는 데 인색하다. 그 것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상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속성과 소통의 논리를 잘 모르는 까닭이겠지만 마음을 내주는 것이 얻는 것이라 깨닫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손해를 보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건 정말 슬픈 일이다. 특히 사회적 가정적 혜택을 많이 받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소통을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단절되고 소외되어 자기를 유기 시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주검이나 이별, 혹은 실패의 경험으로서 인생을 배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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