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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1 20:45
<문화현장/ 세계 문화사 쟁탈 전쟁 5>루이스에 의해 제창된 보티시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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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Wyndham Percy Lewis, 1882~1957) 에 의해 제창된 보티시즘의 최초전이 마지막 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당시 영국 문화계에서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가 보티시즘을 제창하며 영국이 세계 문화사의 주류로 편입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교육적 배경과 풍부한 지적 경험, 유럽의 문화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의 영국적 배경도 만만치 않다. 그는 캐나다에서 영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고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명문 사립학교인 럭비 스쿨과 슬래이드 스쿨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또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교류를 하며 블룸스 그룹과도 가깝게 지냈다. 특히 로저 프라이와 만나 그가 설립한 오메가 공방에 참여하며, 화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친언니인 베네사 (Vanessa Bell)와 던칸(Duncan Grant)과 함께 작업을 했다. 이같이 영국의 문화계의 중심으로 들어가 활동을 하던 루이스가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보티시즘의 꽃을 피우지 못한 까닭을 그의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다.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로저 프라이와 블룸스버리 그룹. 당시 영국의 문화계는 여러 미술가 동인들과 문화인 동호인 그룹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즉 문화가 만나는 다양한 마당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블룸스버리 그룹(The Bloomsbury Group)은 영국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하는 자리였다. 중심 인물로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Fry), C.벨(C.Bell), 화가 덩컨 그랜트(Duncan Grant), 바네사 벨(Vanessa Bell),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Edward Forster),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D.가너트, 전기 작가 G.스트레이치(G.Strachey),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Keynes), 정신과 의사 A.스티븐 등 대부분 캠브리지 출신들이었다. 미술 평론가부터 화가, 작가, 경제학자, 정신과 의사, 시인 등이 모인 쟁쟁한 그룹이었다. 특히 로저 프라이는 캠브리지 출신으로 일찍부터 세잔느와 입체파,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미술 평론을 하며 문화운동을 주도 했던 이론가였다. 그는 직접 그림을 그리며 또 문화운동을 하기 위한 실천으로 오메가란 공방을 설립해 베네사와 던칸, 루이스 등을 고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세잔느 전을 영국에 유치한 큐레이터이자 문화전시 기획자였다. 사실상 문화사와 미술사 속에서 로저 프라이(Roger Fry) 만큼 지적이고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종합적 인식능력과 활동력을 갖춘 역사적 인물로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드 다빈치, 바로크 시대의 루벤스, 그리고 영국의 모리슨, 팝 아트의 앤디 워홀 같은 몇몇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로저 프라이는 공방에서도 실패하고 문화 운동에서도 낙오하고 미술 평론가로써도 별 볼일 없는 루저가 되고 말았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과 파리에서 그림을 배웠다. 화가로써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던 ‘런던 그룹’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미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예리한 감각으로 《비전과 디자인》(1920) 《변형(變形)》(1926) 《프랑스의 예술》(1932) 《영국회화에 대하여》(1934) 대한 저술을 펴내기도 하고 유럽의 대가들을 영국에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1910년과 1912년 두 차례에 걸쳐 후기인상파전을 주최하여 세잔, 고흐, 고갱, 블라맹크, 마티스, 루오, 피카소 등을 영국에 소개한 적극적인 미술 행정가였으며 오메가 공방을 열어 미술 사업을 시도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다양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금 로저 프라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미술가로써도 미술 평론가나 미술 사업가나 문화 운동가로도 그는 영국이란 지역의 역사 한 구석 묶은 책 속에 단 몇 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필자가 이렇게 로저 프라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바로 그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영국이 19세기 위대한 정치 강국과 경제 대국이란 조건과 풍부한 학문적 바탕에서도 세계 문화 미술사 속에서 주류로 등장을 하지 못한 까닭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현/ writer, hyun.h.JunⒸ 미술사가, 문화 평론가, 미술사를 강의하며 국내 매체에 미술과 문화 평론 등을 연재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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