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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1 20:49
<숨겨진 미술사 이야기, 인상파 화가 편 4>재능과 성공과 정말 관계가 없는가? 1
조회 수 3857 추천 수 0 댓글 0
가장 재능이 없었던 화가 고흐 1 역사를 읽고 배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과거에 대한 수많은 사례를 보고 경험하여 오늘의 현상을 전망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을 전망하는 목적은 내일을 위한 각자의 비전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다. 미술사와 문화사가 더욱 중요한 것은 사건중심으로 들여다보는 표면적 사건의 원인 결과에서 깊이 접근하여 집단의식과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 역사는 비전이 있는 방향만을 제시해 줄 뿐이지만 문화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다. 특히 항상 원칙대로 진행되지 않는 세상의 불규칙한 사례를 엿보게 해준다. 예를 들어 인상파 화가들이 미술을 시작할 초기의 미술적 일반적 재능(데생, 표현능력, 색채감각, 공간인식, 조형능력)을 보면, 가장 재능이 없는 작가로 고흐, 세잔을 꼽을 수 있다. 가장 재능이 있었던 작가로는 로트레크, 카유보트, 바지유, 쇠라 등이었다. 이것은 물론 10대와 20대 초 작품을 대상으로 해 아카데미 미술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고 개인마다 다소 의견이 다를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한국의 일반 시민이라는 한국의 미술대학 입시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내 개인적 의견과는 다소 다르다.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는 데생능력보다는 독창적 시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인상파들이 활동할 때는 상황이 다르므로 그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흐의 미술 실력은 화상인 동생 테오도 마지막까지 의심했을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다. 테오는 인상파 화가 기요맹의 그림과 고갱의 그림은 매입해 팔았지만 형인 고흐의 그림은 돈이 될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888년 테오는 고갱에게 아를에 가서 고흐와 함께 작업실을 같이 사용할 것을 부탁하며 생활비를 대주고 그림도 정기적으로 구입해 주겠다고 제의를 했다. 이것은 고갱은 고흐와 달리 당시 그림이 어느 정도 팔리는 화가였다.(1890년 개인전에 30여 점을 팔아 9,635 francs(당시 법대를 나온 엘리트 초봉이 연 2천 프랑 정도)의 수익을 올렸을 만큼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형의 천재적 재능도 몰라본 테오의 안목을 탓해서 안 되는 것은 사실 1888년 이전까지 고흐의 그림은 로트렉이나 고갱, 드가의 10대 후반 수준 정도의 그림을 부지런히 그리고 있었다. 당연 형의 재능을 걱정하면서도 언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형의 실력을 늘려줄 방법으로 개인교사가 될 수 있는 고갱을 생활비와 경제적인 후원까지 해주며 아를로 보낸 것이다. 당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던 고갱은 승낙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두 달여 간을 함께 살다가 이들은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다. 고흐는 사실상 고갱과 잠시 동거한 이후인 1988년부터 그림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인기를 얻고 있는 유명한 해바라기 등 작품들도 이 시기 후에 나온 것이었다. 결국 테오의 희망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전하현/ writer, hyun.h.Jun ©미술사가, 문화 평론가, 미술사를 강의하며 국내 매체에 미술과 문화 평론 등을 연재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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