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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엄정화와 한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호로비츠를 위하여’ 라는 영화를 보았다. 피아노에 재능 있는 한 아이와 ...
by 유로저널 / on Mar 18, 2008 22:21
지난 주에 엄정화와 한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호로비츠를 위하여’ 라는 영화를 보았다. 피아노에 재능 있는 한 아이와 그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명예를 채우고 싶었던 피아노 선생과의 우정을 잔잔하게 그려나간 소박한 감동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으레 그렇듯이 영화가 끝난 후, 옆에 있는 친구에게 열심히 나의 영화에 대한 소감을 일장연설 하였다. 그런데, 몇 분이나 내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듣던 그 친구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호로비츠가 누구지?’ 라는 것이었다. 영화 제목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는 순간, 어떻게 설명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는 피아노계의 앨비스 프레슬리(??)’라고 대답해 버렸다. 영화에 등장한 피아노 선생이 만들고 싶었던 소년의 롤 모델(Role model)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4-1989)’ 는 위에서 말한 대로 클라식계의 앨비스 프레슬리 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유럽을 시작으로 1900년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준수한 외모와 무대매너, 카리스마, 무엇보다도 그의 독창적이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테크닉은 그 당시 클라식계에 충격을 주었고, 이어 현재까지 그의 작품 앨범들은 많은 연구와 함께 마니아들에게 널리 애용되고 있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출생으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안정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난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많은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그렇듯,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인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 1863-1931)’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축복으로 이어졌다. 스승에게서 러시아의 전통음악을 배울 수 있었던 그는 한때 작곡가가 되려고 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사회, 정치적 사건은 그의 인생을 피아니스트의 길로 굳히게 만들었다. 1917년에 일어났던 볼세비키 혁명이, 부유한 그의 집안을 몰락 하게 하였고 경제적 책임을 져야 했던 호로비츠에게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매진하게 하는 계기를 준 것이다. 키에프에서의 작은 리사이틀과 함께, 1922년 카르코프 연주회의 성공을 시작으로 해서, 1925년 그는 베를린에서 대 유럽 무대에 데뷔를 하게 된다. 이때까지 70여 회의 연주회를 하며 기량을 과시하던 그는, 이 베를린 데뷔무대로 인하여 세계적 음악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무대에서 연주했으며, 아직까지도 불멸의 연주 곡으로 평가되어지는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 당시의 청중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도 있는 그의 연주의 해석과 표현은 충격적이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의 청중들이 잘 접하지 못했던 피아노가 흔들릴 만큼의 압도적인 파워와 터치, 크고 긴 손가락이 믿어지지 않는 빠른 움직임과 영롱한 소리, 신들린 듯이 흘러가는 그의 거대한 프레이즈(phrase;악절)사이의 흐름 등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 연주를 시작으로 서방유럽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는 1927년 미국에 데뷔를 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상업성과 맞물려, 예술과 문화에 목말라 있던 미국은 그야말로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1928년 토마스 비첨(Thomas Beecham) 의 지휘와 함께한 뉴욕 데뷔연주를 시작으로 그는 최고의 흥행 연주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의 신선함에 매료된 미국 시민들을 위해 그는 엄청난 숫자의 연주회와 레코딩을 하기 시작하였으며,1932년에 만난 세계적인 이태리 출신의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76-1957)와의 만남은 이러한 그의 흥행을 더욱더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이 두 거장의 음악 스타일이 공통점이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은 서로 세기의 파트너라는 평을 들었는데, 애매함이 없는 거침없는 질주와 시원한 음악적 표현 등으로 자칫 지루함이 있을 수 있는 클라식 음악을 한층 강렬하고 흥미롭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1933년 토스카니니의 사위가 된 호로비츠는 이 무렵부터 잦은 은퇴와 복귀를 하게 된다. 수 많은 연주와 레코딩은 그에게 정신적,육체적인 피로 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의 공백기와 컴백 무대는 항상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 중 하나는 1965 년 4월,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무대이다. 이 연주회는 레코드로 실황 제작되어 (‘The historical come back,CBS’) 엄청난 판매량을 올렸으며, 지금까지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는 하나의 예이다. 1989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돌연 사망하기 불과 이 삼년 전까지 그는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런던 등 공식 순회 공연 을 하였고, 특히1986년에 이루어진 냉전시대에서의 모스크바행 연주는 역사적인 기록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과 그 자신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그의 연주는 1940년대부터 50년대 초까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토스카니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슈만 피아노 곡들, 스카를랏티 소나타들이 명 연주 음반으로 평가되어진다. 또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은 작곡가의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주관적 색채가 강하지만 호로비츠의 독자적인 연주 스타일을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그 후 70년대의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 특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RCA,뉴욕 필) 러시아 계통 연주자에 의한 러시아 음악의 최고 절정을 보여준다. 1980년대 그의 음반은 노쇠한 나이로 인해 그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다소 뒤쳐지는 기술과 터치가 보여지지만, 나이든 연주자에게서 볼 수 있는 깊고 엄숙한 음악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가 이 시기에 연주한 슈만의 ‘클라이슬레리아나 (Kreisleriana)’ 에서 볼 수 있는, 거칠게 흘러가는 그의 음악 안에 숨겨져 있는 내면의 숭고하고 깊은 부드러움 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상업주의에 물든 음악가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피아노 곡들 중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 곡들의 연주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고, 한 작곡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전곡을 완성 한 적도 없다. 음악성과 기술, 상업성으로 인한 연주의 연출력 사이에서의 괴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혹평들은, 그의 유명세에 비례한 꼬리표라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연주자에게는 모든 것을 더 기대하기 마련이다. 100을 기대했을 때 98점이 나온 경우, 그 2점에 대해서 가혹 한 채찍질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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