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후대에서 위인으로 대접을 받는 것은 그들 생에서의 인기보다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가치와 그 전해짐으로 이루어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가로써 파가니니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이 있다. 같은 시대의 많은 낭만파 시대의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탑(top) 리스트에 들어가는 음악가들보다 다소 밀리는 존재감을 주는 이유는, 여러 장르에서 작곡을 한 음악가들과는 달리 그 자신을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 곡들만의 치중과, 또한 악보화 되지 않은 많은 그의 작품들로 인해, 더욱더 다양한 작품의 연구로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가치’에 한계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가 많은 작곡가들에게 준 충격과 연주기법은 새로운 소재와 혁신을 주었으니 말이다. 낭만파 작곡가인 슈만, 쇼팽, 리스트, 브람스,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에게 그는 많은 감화를 주었는데, 특히 리스트,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작품들은 파가니니를 알기 전과 후에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고, 또한 그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은 새로운 도약을 보여주는 창조였으며 후대에까지 다양한 연주방법의 장을 제공했다. 파가니니가 없는 낭만파음악과 바이올린 연주의 역사는 실로 음악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파가니니(Nicolo Paganini,1782-1840)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19세기 최고의 인기를 거머쥔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악마의 바이올린 연주자’,’바이올린 귀신’ 등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그의 신기에 가까운 기교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기도 하지만 그 이외에 스스로 일부러 별난 복장을 입으며 연출을 함으로써 생긴 것이기도 하다. 스타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그는 연주도중 바이올린 줄을 면도칼로 자른 뒤 맨 아래 저음현 한 줄만 가지고 바이올린을 켜고 즉흥연주를 즐겨 하는 등, 그의 연주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최고의 연예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악기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한 개혁적인 음악가였다. 그의 실험은 피아노 연주자에게까지 그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그의 <카프리스 24곡>은 그 테크닉(기교)의 연습과 표현에 있어서 비르투오소적인 측면으로 많은 감화를 준 작품이다. 또한 이 중 마지막 곡인 A-minor의 테마(주제)는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루토스와프스키 등의 곡들에 쓰여졌고, 특히 리스트의 작품에서는 파가니니의 영향력이 더욱 구체적이다. 피아노의 파가니니를 꿈꿔왔던 리스트는 1831년 <파가니니 대 연습곡>을 작곡했는데, 이것은 6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3곡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곡>에서 같은 테마를 취하고 있으며, 그 중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3악장에서 따온 <라 캄파넬라>는 파가니니의 원곡보다 더 훌륭한 평가를 받는 곡이다. 이어 슈만의 <파가니니 카프리스에 의한 6곡의 연습곡>과 피아노 연주자들이 기본적으로 거치고 연마해야 하는 쇼팽의 24곡의 연습곡에서도, 음악적 미와 기교적 목적에서 나오는 아르페지오, 스케일, 3-6도 연습, 트레몰로 등의 사용에서 파가니니의 영향력이 보인다. 그 외에 브람스의 <파가니니에 의한 변주곡 35번>,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등 작곡가들에게 끼친 그의 음악적 입김은 끝이 없어 보인다.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도 그는 다양하고 화려한 표현에서 끊임없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높은 포지션의 음역을 대담하게 활용하였으며 넷째 현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였고(소나타 마리아 루이자, 군인, 나폴레옹 등의 곡들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고 난이도 기교, 즉 2중 트릴(떤 꾸밈음), 화음의 연속연주, 2중 플레절렛(왼손 기교의 한 가지), 자연음과 플레절렛의 병행, 활로 긋는 궁주와 왼손 손가락으로 퉁기는 피치가토, 도약을 이용한 스타카토와 기타의 연주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더블 스토핑(여러 음을 동시에 내는 기법)과 하모닉스,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 분리 등의 곡예적인 주법을 만들었다.
아쉽게도 파가니니의 연주법은 그 유파를 형성하지 못한 채,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함께 그의 세대에서 끝나게 되었다. 시볼리란 제자가 한 명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연주에 대한 기법을 섣불리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악보를 남에게 보여주기도 꺼려한 그는 외골수 적인 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인간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괴팍하고 사나 왔던 그는 두 얼굴의 사람이었고,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자신의 애용하던 악기인 ‘과리넬리 델 제수(1742년 제작)’를 전당포에 맡기는 등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인물이기도 했다.58세의 생을 마친 그는 악마와 관계된다는 이유로 죽어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프랑스 니스의 파르마란 곳에 매장되었다. 낭만파 최고의 대중스타였던 그의 쓸쓸한 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