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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k Satie(1866-1925,프랑스) 사티의 음악은 영화에서 가장 애용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일 것이다. 사티의 음악이 갖고 있는 ...
by 유로저널 / on Jun 24, 2008 23:46
Erik Satie(1866-1925,프랑스) 사티의 음악은 영화에서 가장 애용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일 것이다. 사티의 음악이 갖고 있는 뚜렷한 색깔은 영화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준다. 몽환적인 느낌과 그 독특함으로 스크린에 빠져 들 수 있게 끔 만드는 것이 바로 사티의 음악이 가진 마력이기도 하다. 영화 북회귀선,프라하의 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사티의 음악이 갖고 있는 이러한 캐릭터 이외에, 그의 음악은 요즘 유행하는 뉴에이지 음악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기를 누린다는 생각이 든다. 분위기를 주류로 하는 뉴에이지 음악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감정적으로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존하던 당시의 음악계가 계승하던 낭만주의, 혹은 당시에 유행했던 인상주의의 세태속에 그의 음악은 반항적 기질이 다분했지만, 지금 우리가 접하는 사티의 음악은 어느 분야의 음악이라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여러가지 각도에서 즐길 수 있는 음악적 쾌감을 준다. 몇몇 작곡가들이 처해 있던 힘든 생활고를 비롯한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 다른 정신적 차원의 세계에 대한 갈망에서 탄생하는 ‘예술’로써 더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그래서 흔히 ‘예술가들의 고통’은 ‘위대한 작품으로의 통로’라는 말을 한다. 사티가 처해 있었던 고달펐던 상황과, 당시의 예술계에서 이단적 취급을 받으며 고집한 그의 음악 또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품같은 걸작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초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고통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예술 작품’ 이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다소 순탄치 않은 일생을 보낸 사티는 1866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옹플뢰르 태생으로 해운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다. 성당 오르가니스트인 비노(Vino)에게 피아노를 배운 후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했으나 보수적 음악 성향을 갖고 있던 당시의 음악 교육에 반감을 갖고 상당 기간동안 독서와 건축에의 몰두 등 음악으로부터의 외도를 하게 된다. 결국엔 다시 음악작업에 몰두했지만, 가난함 때문에 카바레와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버는 등 고된 청년기를 보냈다. 뜻밖의 행운이었던 것은, 그는 그가 일하던 카페에서 우연히 드뷔시와의 인연을 갖게 된 것이다. 사티의 음악에 영감을 받은 당시의 거장 드뷔시는 그 자신의 작품에 그 영감을 기여함과 동시에 사티의 작품 ‘그노시엔느(Gnossiennes)’ 중 두 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기에 이른다. 드뷔시로 인한 음악계의 입성으로 사티는 자신의 음악활동의 영역을 넓히게 된다. 하지만 드뷔시가 이끈 사티의 음악계로의 입성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다. 폭음과 기괴한 복장, 중세 음악의 심취, 종교단체를 만드는 한편 신비주의적 단체인 ‘장미십자교단’에서의 활동과, 단순성을 추구하며 기존의 음악계가 쌓아온 신조에 대한 무시는 그에 대한 인간적인 거부와 함께 그를 아마추어 음악가로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점에 회의를 느껴서인지, 그는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의 작은 방에서 은둔한 채 외부인들의 출입을 거부하며 작품에 몰두하게 되는데, 음악적으로 그가 ‘조롱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싸늘한 소품집(Pieces froides,1897)’을 시작으로 ‘새로운 싸늘한 작품(Nouvelles Pieces froides,1906-1910)’, '불쾌한 개요(Aprecus desagreables,1908-1912)',‘정말로 야무진 데가 없는 개를 위한 전주곡(Veritables preludes flasques pour un chien,1912)’등 제목만 들어도 조롱과 해학이 가득 찬 작품들을 발표하게 된다. 독특한 음악과 함께 독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 시도 했던 일은 1905년 39세의 나이로 음악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음악계에서 인정을 받기 위한 그의 새로운 시도이긴 했지만, 전문적 수업을 받은 후 발표한 그의 작품 ‘ 승마복을 입고(En habit de cheval,1911)’는 불행하게도 ‘과대망상증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혹평을 받게 된다. 이후 사티의 기존 음악계에 대한 거부는 더욱 확고해 진다. 사티는 그의 음악에서 미니멀리즘(minimalism)를 추구하였다. 미니멀리즘이란 최소한의 악기편성으로 인한 심플한 선율의 추구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패턴으로 이루어지는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티를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만든,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할 수 있는 ‘짐노페디(Gymnopedies)’중 1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G와 D의 반복적 반주부터 시작되어 나오는 단순한 멜로디, 화성과 프레이징의 규칙성에서는 다소 벗어나지만 반복적 리듬에 의한 통일적 구성이 전 30마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는 그가 흔히 이야기 하는 ‘furniture music’으로서의 실험적 시도를 하였는데, 이것은 순간적으로 들리는 표면적인 음악보다는 배경(background)적 음악에서의 충실을 의미한다. 배경적 음악에의 충실은 좀더 넓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탁월한 독창성에 의한 음악형식과 함께 그는 통상적인 악보의 지시어 대신에 색다른 표현법을 썼다. 예를들면, ‘매우 광택나게’, ‘자기 자신에게 의뢰하는 느낌으로’, ‘한걸음 한 걸음’, ‘이가 아픈 꾀꼬리 같이’등의 표현은 그의 해학성과 신비주의적인 작곡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짐노페디의 3개의 피아노 작품 이외에 Vexations, 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 Parade, Relache등과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으나 근래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곡들은 1960년대까지 그다지 환영받지를 못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과 자신의 음악이 시대에 너무 앞서있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음악계에 이단아 로써 떠돌던 그는 1925년 간경화로 고독속에서 홀로 사망하였다. 독창적인 음악세계로 초현실주의를 이끈 음악가의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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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news-미셸장의 클래식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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