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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Elgar(1857-1934) ‘사랑의 인사(Salut D’ amour)’라는 곡은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나는 3중주가 있는 결혼...
by 유로저널 / on Aug 24, 2008 20:15
Edward Elgar(1857-1934) ‘사랑의 인사(Salut D’ amour)’라는 곡은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나는 3중주가 있는 결혼식장에 갈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이 곡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제목의 의미와 감미롭고 아름다운 선율로 사랑의 결실을 약속하는 결혼식의 분위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을 작곡한 엘가는 실제로 이 곡을 자신의 인생적 지주이며 사랑하던 아내인 앨리스에게 헌정했다. 그가 음악활동을 시작하며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갖기까지 옆에서 정신적으로 내조한 앨리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는데, 그가 앨리스가 죽은 후 실의에 빠져 14 여년 동안 이렇다할 곡을 만들어내지 못할 만큼 그녀에 대한 의존과 사랑은 깊었다. 이러한 짧은 에피소드는 엘가가 영국의 몇 안되는 대표적 작곡가라는 것, 근대의 작곡가 이지만 고적 양식을 추구하며 영국의 민요적 요소를 작품에 삽입 시켰다는 것,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ous)’,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과 살롱풍의 대중적 작품으로 시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 그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로 많이 알려진 독일계와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다소 밀린 그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의 인생을 ‘Classic Cat’에서 번역, 의역해 보았다. (http://www.classiccat.net/elgar_e/biography.htm) <초년> 에드워드 엘가는 Worcester 근처의 Lower Broadheath 에서 피아노 조율과 상점을 운영하며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8세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며 후에 오르간도 연주를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바이올린을 좋아하며 첫 작품도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상점에서 음악에 대한 책들과 악기들을 다루고 독학을 하며 재능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교외로 사이클을 타고 악보를 구상하며 자연과 음악의 조화를 배우게 된다. ‘대기에는 음악이 있다. 온통 우리 주변에는 음악이 있다. 세상은 음악으로 채워져 있고 너는 네가 원하는 만큼 쉽게 음악을 접할 수 있다.’ 15살이 되던해 그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경제적인 문제로 지방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바이올리니스트와 오르가니스트로써 음악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몇 개월 후 사무실을 그만두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수업을 하며 Worcester Glee Club에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가수와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첫 작품을 쓰게 된다. 이후 22살이 되던 해 그는 Powick의 Worcester and Country Lunatic Asylum 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Worcester 와 Birmingham 페스티발 등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드보르작, 모차르트과 베토벤 등 여러 대가의 작품들과 그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해외공연과 작품발표에 난항을 겪으며 생활고와 함께 20대의 중반을 보낸 그는 29살, 드디어 그의 아내인 앨리스(Alice(Caroline) Roberts)를 만나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교사와 학생으로 만난 그들은 8살의 차이였으며 (앨리스가 연상이었다) 소장 출신의 기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의 만남을 환영할 리가 없었다. 결국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들은 3년 후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앨리스와의 결합은 엘가에게 새로운 음악적 인생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해주는 가장 큰 버팀목이 된다. 엘가의 부인 앨리스는 그의 정신적 치유자, 너그러운 음악적 조언자인 동시에 그의 사업 매니저 겸 비서였다. 그녀는 아직 음악가로써 성공하지 못하고 있던 그를 믿고 지지했으며 그를 영향력있는 사교계에 소개를 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힘을 주었다. 그녀가 일기에 ‘천재를 내조하는 것은 어느 여성에게나 일생에 충분한 일을 하는 것이다’ 라고 쓸 만큼 앨리스는 그 자신의 일에 신념을 갖고 있었다. 영국 음악의 중심지였던 런던으로 본거지를 옮기며 성공을 꽤했던 이들은 비록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Great Malvern으로 다시 거주지를 옮기면서 레슨과 지휘로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와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여유는 엘가에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동시에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며 그에게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된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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