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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저널 / on Dec 22, 2008 02:31
Felix Mendelsshon:1809-1847 멘델스존은 역사상 음악가들중 보기 드물게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다. 음악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이지만 이러한 삶 때문일까, 발랄하고 경쾌한 곡들에 있어서는 탁월하나 고통안에서 탄생했던 거장들의 심각한 중후함을 비교하면 왠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행복한 아름다움은 어느 거장의 음악에 못지 않는다. 낭만적 형태의 선율과 고전적 질서의 조화에서 느껴지는 그의 음악은 듣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한층 고조시킨다. 이번 글에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낭만주의의 대표 작곡가, 멘델스존에 대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멘델스존은 독일 함부르크 출생으로 유복한 유태계 은행가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계몽 운동가 M. 멘델스존 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가 겸 문학 연구가로 4개국어를 다루던 사람이었다. 멘델스존은 이러한 교양있는 부모님 밑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음악, 어학,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중 음악에 관심이 많던 어린 멘델스존에게 그의 부모님은 질 높은 음악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켰고 결국에는 9살때 공개연주를, 10살 부터는 작곡을 시작하여 17세에 이미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 의한 서곡을 작곡했다.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의 음악적 재능은 괴테에게도 특별한 감흥을 주었고 그들의 인연은 멘델스존이 바흐와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기 시작한 12세부터 시작되어 그의 ‘현악 4중주 b 단조’를 괴테에게 헌정하기까지 평생동안 이루어졌다. 유럽의 여러곳을 방문하며 음악활동을 하게 된 멘델스존은 스위스에서 베버를 만나게 되어 그의 음악에 대한 자극으로 ‘현악 8중주’를 작곡, 1829년에는 지휘를 하기 위해 런던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하였다. 1830년부터 약 2년 동안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등을 여행하였다. 이러한 여행은 그에게 많은 체험과 감흥을 주었고 묘사적,회화적 요소와 함께 민속적 리듬과 멜로디, 색채적인 관현악법 등으로 그의 음악에 중요한 소재를 안겨주었다. 1830년 ‘무언가’를 출판하여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신뢰를 받으며 유럽의 최고 인기 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영국과의 인연으로 그는 ‘스코트랜드 교향곡’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하였고 영국 공주의 결혼식에는 ‘한여름밤의 꿈’의 수록곡 ‘결혼행진곡’을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1846년 오라토리오 ‘엘리아’로 영국에서 최고로 영향력있는 작곡가가 되었지만 결국에 고향인 독일로 돌아오게 된 그는 뒤셀도르프에서 교회음악과 오페라 지휘를 하였고 케른에서는 라인 음악제의 지휘자로, 라이프찌히에서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멘델스존은 이 악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 놓음과 동시에 라이프찌히를 최고의 음악도시로 만들었고 음악 학교를 설립하여 슈만과 함께 교육에 힘쓰는 등 작곡가, 지휘자, 교육자, 음악 운동가로 열성적이게 살다가 38세에 과로로 단명하였다. 명연주자이기도 했던 멘델스존은 피아노를 음악 표현의 기본으로 생각했다. 그는 g 단조(1831)를 비롯한 협주곡과 소나타 세곡, 전주곡과 푸가, 변주곡과 환상곡 등을 작곡했는데 이들 작품의 양식은 대체적으로 서정적 장르로 섬세하고 품위가 있다. 슈베르트의 곡들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혹자는 멘델스존을 슈베르트의 계승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스승이였던 베르거(L.Berger)에 대한 영향과 의존도가 더 높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그의 대표작인 ‘무언가’는 48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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