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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저널 / on Dec 08, 2008 02:39
Sergei Prokofiev; 1891-1953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중 한 사람인 프로코피에프는 복잡한 세계정세와 독재적 체제하에서 유럽과 미국, 고국인 러시아 망명을 거친 그 누구보다도 다양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탓일까, 그의 작품을 들으면 전쟁과 파괴, 스산함, 악마적, 고통스러운 애잔함이 연상된다. 몇 년전에 그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을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전쟁 소나타라고 불리우는 이 곡은 그야말로 ‘전쟁’의 곡이었다. 어린 나에게 적잖은 감동을 안겨준 앤더슨의 ‘워털루 전쟁’도 전쟁의 묘사로 처음 접한 훌륭한 곡이었지만 성인이 된 나에게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7번이 다가온 추상적인 전쟁의 묘사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날카로움과 파괴, 어두움, 폭풍과 같이 몰아치는 열정,, 많은 어려운 부분을 순조롭게 묘사하기 위한 힘겨운 연습의 시기는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매번 이 곡을 접할 때 느꼈던 나의 감정은 단순한 즐거움과 감동 그 이상이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우크라이나의 손초프카 출생으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5세에 ‘인디안 갤럽(Indian Gallop)’,이어 9세에는 첫 오페라 ‘거인(The Giant)’를 작곡할 정도였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빙클러와 에시포바, 림스키 코르사코프등을 사사하며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된 그는 점차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써의 기량을 나타내며 1914년 루빈스타인 피아노 콩쿨에 입상을 하게 되었다(그는 이때 그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해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콩쿨 입상 이후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를 병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한 그는 해외공연과 오페라 도박사, 피아노 소나타 3, 4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0곡으로 된 소곡집 등의 작품을 2년만(1916-1917)에 작곡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활동할 공간에 제약을 받게 된 그는 결국 1918년 미국에 망명을 하게 되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러시아 출신의 라흐마니노프와 비교하며 혹평을 하기도 하였지만 뉴욕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그는 빠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오페라 ‘3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무대로 올리는데 실패한 그는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1920년에는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보다 안정된 음악 활동을 하게 된 프로코피에프는 러시아 발레, 3번째 피아노 콘체르토를 발표하며 오페라 ‘3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공연에 다시 도전, 시카고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음악적 성공과 함께 1923년 스페인 출신 가수 리나 루베라와 결혼하여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 그는 정착을 하여 10여년 동안 머물게 된다. 하지만 당시 파리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신고전주의자들과 다른 길을 걸어갔던 그에게 파리의 음악활동은 회의를 느끼게 하였고 결국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20년 동안을 스탈린 상을 받으며 국가적 영웅이 된 그는 많은 재정에 힘입어 교항곡,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바이올린 협주곡 등 여러 위대한 작품을 발표한 채 모스크바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과 같은 날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코피에프는 그 자신의 음악적 특징을 5개로 요약했다. 하나는 고전주의와 바로크 형식을 추구, 둘째는 새로운 화성적 언어로의 혁신, 셋째는 리듬의 생명력과 같은 동력적 요소, 넷째는 서정적 요소, 다섯째는 괴상스러움이 드러나는 악마적 암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고심하며 추구한 부분은 바로 선율이었다. 명확한 선율을 추구하기 위해 그가 주장했던 것은 어렵고 복잡한 선율보다는 익숙치 않은 청중이 들어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함이었다. 당시 전체적인 음악 트렌드였던 복잡한 화성적 구조의 생리상 선율은 곡의 흐름상 자칫 까다롭게 만들어 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고심은 결국 교향곡 5번과 7번이라는 명작을 만들어냈고 이 곡은 서정적 묘사와 반복적 청취의 선율속에 정교하게 짜여진 내부 구성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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