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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30 18:49
너희가 노래(謠)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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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노래(謠)를 아느냐 -인순이의 노래와 아프간으로 떠난 선교사들의 노래, 그 차이에 대하여-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9장 18-27)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사무엘 6장 16-23) 벌거벗은 아버지의 몸을 본 죄로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아야 했던 함의 후예들은 두고 두고 억울할 것이다. 노아 할아버지의 술주정이 과해도 한참 과한 것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술만 죽일 놈이 되는 것이다. 미갈 또한 마찬가지다. 왕이신 지아비가 아랫도리를 만백성 앞에 드러낸채 백주에 펄펄 뛰고 있으니 이 어찌 망측한 일이 아닌가. 그것에 대한 잔소리좀 했기로 서니 여자에게 가장 무서운 자손을 끊어버리는 저주를 내렸으니 다윗이 취해도 한참 취해버린 것으로 해석해버린다면 노아나 다윗은 술주사가 심한 노인네 쯤으로 치부돼도 좋으리라. 홍수에 살아남은 노아는 첫 농사로 포도나무를 심어 그 수확물인 새포도주로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았으랴. 온 지상의 생물이 멸종되고 오직 자신의 가족과 방주에 실린 생물들만이 살아남았으니...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겨올 때 다윗의 즐거움 또한 어찌 했겠는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거창하게 드려야 할게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사상에 반드시 올라야할 제수음식가운데 고기(肉)와 떡, 기름과 술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이전 시대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란 이러한 제사 행위를 통해서 였기에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제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가나안의 조상 함이나 사울왕의 딸 미갈이 이러한 제사의 의미를 모르는 까닭에 저주를 받아 마땅했던 것이다. 함을 저주한 노아는 그 뒤로도 제사 때마다 대취해서 옷을 훌러덩 벗었을 것이고 다윗도 여전히 제사 때마다 힘써 뛰놀며 아랫도리를 만백성 앞에 드러냈으리라. 이러한 제사양식이 漢字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면 독자들은 믿겠는가. 하나님의 말씀(言)을 肉(고기-)와 술통(缶-장군부)이 놓인 제사상 앞에서 목청껏 외치는 것이 노래(謠)라는 글자이다. 이러한 노래(謠) 또한 때와 장소에 따라 불러져야 그 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고 또한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아프간으로 떠난 젊은이들은 타 종교의 사원에 들어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찬송가를 불렀다고 대단한 용기있양 인터넷에 올렸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가 전세계의 비웃음거리를 가져오는 판국에 이르렀다. 이것은 세상의 평화와 신에 대한 찬미를 노래한 찬송이 아닌, 세상 노래보다 못한 분쟁의 씨앗이 되기에 차고 넘치는 것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경우가 지난 금요일 윔블던에서 있었다. 한국에서 여행차 영국에 온 가수 인순이는 교회에서 세상노래를, 그것도 고혹적 율동과 함께 불러재꼈다. 프로급 가수들이 사용하는 엠프나 마이크가 아닌 교회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서 가수 인순이는 한시간 반이 넘는 시간을 아무런 무대 장치도 없는 가운데 자신의 노래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적지 않은 금요 예배자들 또한 이 예상치 못한 공연을 통해 전혀 다른 경험을 체험하였다.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날 예배 참석자들은,노아와 다윗만은 못했을지라도 신의 은총을 체험하는 귀하고 귀한 순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한 시대 최고의 藝人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중에 축복이다. 자신들의 세계만을 강요하는 젊은이들의 몰지각함이 아닌, 농익을 대로 농익은 예인의 흡입력은 조물주에 앞에선 인간의 무한한 겸손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할 것이다. < 칼럼리스트 박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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