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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한국에 있다. 영국에서 바쁘게 생활하다 한국에 들릴 때면 마치 긴 휴가를 온 듯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진다. 또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던 영국에서의 나의 규칙적 생활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게을러진다. 9시쯤이면 준비되는 엄마의 아침 밥상조차도 잠이 깨지 않아 입에 들어오질 않는다. 꼭 밀린 잠을 자듯 잠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밥을 먹은 후에도 또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한다. 가족 곁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은 멀었다. 더욱이 이번엔 일본을 들렸다 왔기 때문에 하루가 족히 걸린 듯하다. 영국에서 한국까지 오면서 거의 하루 정도를 아무 말도 안 한 셈이다. 말이라는 것은 내 생각과 마음, 의사를 설명해주는 수단이다. 사람들은 항상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말을 하는 그 순간에는 생각이 그리 깊어지지 않는다. 말을 얼마나 더 명확하고 조리 있게 하느냐에 신경을 더 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을 깊이 하거나 뭔가를 골똘히 고민 중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아니면 머리 속에 생각들을 비우고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는 중일 수도 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거의 하루의 시간 동안 난 많은 생각도 할 수 있었지만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커피숍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구경은 말과 생각이 없이도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항상 ‘창조’를 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 따라야 하는데 그 창조를 위한 동기나 원천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 꽤 괜찮은 방법 중 하나가 사람의 얼굴구경이다. 정원에서 뛰어다니며 짖어대는 개의 모습에서 빠른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한 기발한 발상을 가질 수 있으며, 차창 밖으로 펼쳐진 평온한 풍경을 보면서 멋진 풍경화를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은 정말로 다양하다. 그만큼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나 ‘창조’를 위한 훌륭한 발상을 가질 수 있는데 삶 속에서 가장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특히 얼굴 말이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항상 많은 다양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고 때로는 그 표정들 때문에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얼굴의 표정 또한 바뀌기도 한다. 나의 주된 작업인 캔버스 위에 그리는 아크릴화를 제외하고 간단한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할 때에는 이런 사람들의 표정의 포착이 재미있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표정을 도화지 위에 담으면 내 그림의 느낌도 그 표정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표정을 읽는 연습을 한다. 히드로 공항을 거쳐 일본에 들리고 한국까지 도는 긴 여정은 ‘창조’를 위한 훌륭한 시간이었다. 얼굴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정을 포착하고 그 모델이 가진 얼굴골격의 특징을 잡아 내는 것이다. 여기에 맞춰 생각해 보면 다양한 민족들이 드나드는 히드로 공항은 정말 훌륭한 배움의 터였다. 또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공항 안에서는 사람들의 감정이 더욱 민감하게 움직이고 얼굴의 표정이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의 시작부분을 보면 히드로 공항의 숨겨진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히드로 공항이 그냥 바쁘고 정신 없는 공간이 아니라 만남과 이별이 있는 뜻있는 장소라는 점이다. 오래 떨어져 있던 연인이나 가족들이 만나기도 하고 멋지게 배낭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친구를 맞이하기도 한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의 그들의 얼굴은 기쁨의 표정으로 가득하며 나이에 상관없이 젊고 활기찬 모습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조차도 행복으로 마음이 충만해진다. 히드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나도 잠시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봤다. 마치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이 한눈에 보였다. 행복의 만남 속에서 기쁨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고, 비즈니스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긴장감이 약간 감돌았다. 또 어떤 이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왜인지는 몰라도 아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짜증이 가득했던 그들의 얼굴은 주름진 눈가와 미간이 먼저 보였고 쳐진 입꼬리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나와 들고 있는 짐들을 먼저 부친 후 비행기를 타러 갔다. 비행기 안은 항상 좁다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이 촘촘하게 붙어 앉아 긴 시간을 함께 가기 때문이다. 옆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그 여정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다. 영국에서 일본까지 가는 13시간 동안 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왼쪽의 남자와 오른쪽의 여자는 앞만 바라보고 시계만 주시했다. 승무원이 건네주는 음식이나 음료를 전달하는 그때만이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들 또한 나처럼 머리 속에 생각들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말이 없는 13시간은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난 조용히 생각 중이었다. 가끔씩은 생각 속에서 빠져 나와 내 옆에 앉아 있는 그들을 관찰했다. 그 두 남녀는 많이 피곤해 보이는 표정으로 때로는 잠을 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음악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오른쪽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내가 식사를 하든지 책을 보든지 그 애가 나를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스를 주문하면 똑같이 주스를 시키고 영화라도 보려고 하면 리모콘을 작동하는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였다. 그때 그 애의 표정 속에 궁금증과 약간의 어색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힐끔거리는 눈은 나에게 작은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그 애가 나에게 한마디를 건냈다. “제…가 처으므로 이런 비행을 해슴니다.”라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생각을 정리한 후 바로 알 수 있었다. 외모는 한국인처럼 생겼으나 외국인이었고 왜인지는 몰라도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13시간정도의 긴 비행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비행기 안에서의 모든 게 어색했던 거다. 그 애가 단 한마디를 건넨 이후 난 더욱 그녀의 표정이며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왜 한국에 가는 것인지에 관한 의문에 한참 생각을 했어야 했다. 말이 없어도 가끔씩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는 그 애의 얼굴을 읽고는 난 살며시 도와주기도 했다. 리모콘을 대신 작동해주고 식사를 위해 테이블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그녀의 얼굴에는 허둥대거나 당황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편안한 미소가 남았다. 비록 말은 없으나 13시간 동안 계속 내 신경을 쓰이게 하던 그녀 덕분에 난 새로운 얼굴표정의 변화를 찾을 수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한 후 인천공항에서 만난 한국인들의 바쁜 움직임은 난 행복하게 했다. 한국인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마냥 좋다. 아무리 짜증나고 화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난 행복함만을 찾는다. 왜냐면 한국에서만큼은 난 예술을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거나 열심히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교민이 아니라 그냥 집에서 잠만 자도 좋은 게으른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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