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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볼 수 있는 곳, Borough Market

이제 런던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여름이 한국처럼 무더운 것이 아니라 가을의 선선함이 선뜻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침, 저녁의 쌀쌀함은 4시정도면 해가 떨어지는 겨울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떨어지는 낙엽과 점점 푸른 빛을 잃고 깊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나뭇잎을 보면 ‘가을’에게서만 느껴지는 낭만을 찾을 수 있다. 유난히 공원이 많고 그 곳에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 온 큰 나무가 많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가까운 공원으로 향한다면 가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선한 날씨가 다가오면 따뜻한 홍차 한잔이 더욱 생각나고 길거리 옷 깃을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더욱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더위 때문에 땀내에 찌든 답답한 공기가 있는 곳이나 사람들과 자꾸 부딪히는 공간을 피하게 되는 여름과 달리, 가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얼굴의 인상을 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 가벼운 웃음을 남기고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웬만한 불쾌한 상황에도 마음을 너그러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움을 가지게 된다. 햇빛이 아침부터 강하게 내리쬐는 여름보다는 지금과 같은 초가을이 오히려 나들이를 가기엔 좋다. 친구나 연인의 팔짱을 끼고, 혹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이다.  

런던에는 여러 종류의 시장이 많다. 관광객이 항상 북적대는 노팅힐 포토밸로와 캄뎀 마켓도 있고 중고품을 가져다 길거리에 늘어놓고 파는 카부츠 마켓도 허다하다. 시장의 성격에 따라 사람들도 원하는 것이 다른데 카부츠 마켓 같은 경우는 무엇을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 중고품이지만 흥미가 넘치는 물건들을 구경하고 새 물건처럼 빤듯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것들 속에서 쓸만한 물건 하나 건지는 데서 오는 기쁨이 가장 크다. 시장은 잘 진열해놓고 소비자의 구미를 당기는 대형 마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미가 있는 곳이다.

지하철 주빌리 라인을 타면 보로우(Borough)라는 역이 있다. 보로우 마켓이 거기 근처에 있는데 이 마켓이야 말로 사시사철 흥미가 넘치는 곳이다. 매주 세 번에 걸쳐 장이 열리고 토요일 같은 경우 아침이면 문을 열어 오후 늦게 닫는다. 사실 보로우 역보다는 런던 브릿지 역에서 하차하는 것이 훨씬 가깝고 시장의 입구도 여러 군데다. 액세서리나 옷 등 소비품을 파는 대부분의 시장과 달리 여기서는 주로 음식물을 취급한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등이 주된 물건이고 마켓 바깥쪽에서는 꽃이나 화분을 판다. 바로 만든 과인 스무디와 햄버거 등 먹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고 오는 것이 좋으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걸 사 들고 다시 구경을 하면서 먹으면 된다. 여기에서 시장을 보는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도 있지만 런던에 사는 현지인들이 많다. 노팅힐 포토밸로 마켓 끝에 위치한 야채시장도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된 액세서리 시장만 구경하고 발길을 돌리는 관광객들보다 단지 야채시장만을 들리는 현지인들이 많다. 이런 음식시장은 일반적으로 상품들이 신선하다. 가격이 대형 마트보다 훨씬 싼 것은 아니지만 시장이 문을 닫을 때 가면 여러 개를 묶어 하나의 가격에 팔거나 몇 개 안 남은 빵이나 과일들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절대 가격 흥정이 불가능한 마트보다 물건 사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보로우 마켓을 천천히 둘러보면 한국에 있는 재래시장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면 그 신기함은 말도 못한다. 내 얼굴보다도 더 큰 버섯, 시멘트 블록보다도 더 큰 덩어리째 쌓아놓은 초코렛 등 눈을 뗄 수 없는 것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런 곳 앞에는 큰 덩어리를 잘게 썰어 시식을 할 수 있게 해 놓아서 꼭 한국의 대형 마트에 들린 듯한 기분을 주기도 한다. 또 박스 채 놓여진 야채와 과일들은 알록달록 다양한 색으로 사람들의 눈을 끌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야채지만 팩으로 포장되어 있어 감히 만질 수 없었던 마트 쇼핑과 달리 여기에서는 신기한 건 얼마든지 만져 볼 수 있다. 사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한 야채나 과일들은 항상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맛을 어떨지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하는지 어느 부분을 먹어야 하는지 등 알고 싶은 것들 투성이다. 여기 시장에서는 주인에게 물어보면 된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주인들은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하고 여기저기서 물건을 짚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한시도 정신을 놓을 수 없고 바쁘게 손을 움직여야 한다. 한 손님의 물건을 봉지에 넣으면서 다른 손님에게 물건 가격을 말해 줘야 하며, 나같이 어떻게 먹는지 조차 모르는 손님을 만나면 친절하게 설명도 해줘야 한다. 항상 정신 없어 보이는 주인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물건들에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다른 어떤 곳보다 신선하고 알참 물건을 선보인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기도 하고 말이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는 요즘, 시장구경은 좋은 나들이인 것 같다. 아침에 간단한 토스트를 먹고 집을 나서는 것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생각해 따뜻한 외투를 하나 챙기는 것은 잃지 말자. 토요일 아침이라 거리는 평일보다 조용하고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다. 하지만 막상 마켓 근처에 들어서면 이제 잠에서 막 깨 나온 우리와 달리 새벽부터 물건을 실어 오고 새벽 손님을 맞은 장사꾼들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발견 할 것이고, 벌써 양 손 가득 물건을 사들인 부지런한 사람들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여기 마켓에 자주 가는 사람들도 매번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시장의 규모도 그렇지만 상품의 다양함 때문일 것이다. 고기나 생선들도 일반 마트보다 종류가 다양해 뭔가 새로운 요리를 해볼까 하는 이들에게 딱 이다. 구경을 하다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바로 구입하자. 난 일반적으로 신선한 샐러드가 들어간 치킨 샐러드와 푸딩을 산다. 그것을 들고 마켓 한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템즈 강이 나온다. 템즈 강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과 강변 풍경을 바라보면서 마켓에서 산 음식을 꺼내 따뜻한 점심식사를 하는 거다. 가을이라 하늘도 유난히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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