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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이 왔다. 흐린 구름만 잔뜩 끼어있고 계속 내리던 비도 멈추고 높은 청명한 가을하늘과 맑은 햇살이 가득하다.

천고마비라는 표현은 원래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로, 당나라 초기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시에서 나왔다. 두심언은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을 떨쳐, 소미도(蘇味道), 이교(李嶠), 최융(崔融) 등과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고 불렸다.

구름은 깨끗한데 요사스런 별이 떨어지고[雲淨妖星落]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高塞馬肥]
말 안장에 의지하여 영웅의 칼을 움직이고[馬鞍雄劍動]
붓을 휘두르니 격문이 날아온다[搖筆羽書飛]

이 시는 두심언이 참군(參軍)으로 북녘에 가 있는 친구 소미도가 하루빨리 장안(長安)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지은 것으로 변방의 정경과 당나라 군대의 빛나는 승전보를 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구절은 당군의 승리를 가을날에 비유한 것이며 '추고마비'는 아주 좋은 가을 날씨를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한편,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보면, 이 말은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족 흉노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해마다 가을철에 중국 북방 변경의 농경지대를 약탈하여 기나긴 겨울 동안의 양식을 마련했으므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의 침입이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뜻이 변하여, 누구나 활동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추고마비'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을 더 자주 써 하다못해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어린 학생들도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보며 “아, 천고마비의 계절이 왔구나.”라고 말과 함께 위대한 시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면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한다.

두심언의 시에서처럼 가을이 활동하기에 좋은 계절이긴 하다. 물론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라기 보다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선생님들이 늘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때는 천고마비, 공부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사춘기,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는다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가 아닌가?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만 되면 학교 뒤 언덕에 올라가 떨어져있는 낙엽 사이를 뒤적거려 제일 예쁜 색으로 물든 것을 골라 책갈피 사이에 꽂아 놓기도 했었다. 마음 속 가득 넘치게 좋아하던 선생님이라도 있으면 제일 고운 색의 낙엽은 당연 그 선생님 것이 될 것이다. 물론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하나, 가을이면 친구들과 어디로 놀러 갈 계획을 세우기 바빴었는데,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친구들과 치밀한 계획 아래 보충수업을 빼먹기도 했다. 보충 수업을 알리는 종이 치면 이미 싸둔 가방을 들고 조금 열어놓은 뒷문 앞에 서 있는다. 그러면 정원 체크 같은 건 하지 않고 감독만 하러 오시는 선생님이 뒷문 복도를 지나 앞문으로 향하면 우리들은 이미 열려 진 문틈으로 까치발을 하고 조용히 숨죽이며 나가버렸었다. 그러고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떡볶이와 김밥이 맛있는 분식점으로 가 음식을 한 가득 시켜놓고 수다를 떨었었다. 이것도 추억이라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회상하는 지금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풍성했던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초록빛이 가득했던 나뭇잎들이 황금빛의 노란색, 달콤한 와인 한잔과 같은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면 과거로 향하는 생각들이 많아진다. 옷깃에 스며드는 찬 바람과 새 잎이 돋는 봄과 달리 여름 내내 한창 푸르렀던 떨어진 낙엽들은 우리의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만들고 입 밖으로 내뱉는 말보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말들이 더 많아져 앞으로 인생에 드리워질 희망이나 기쁨에 대한 기대보다도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진 추억들이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한국에 있다면야 그 추억 속에서 함께였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가을 향이 풍기는 장소로 가 여유로운 저녁식사를 한 후, 술 한잔을 들이키며 유치했을 수도 있는 지난 날들의 추억을 하나 둘씩 꺼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그런 애틋한 시간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가을 속에 더욱 아쉬움과 그리움이 커지는 것일 거다. 하지만 그런 안타까운 생각들로 2007년만의 독특한 가을 향을 만끽하지 않을 순 없다. 방법을 찾자.

일단 소꿉친구나 오래 전부터 같이 해온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여기 영국에서의 생활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이들에게는 따뜻한 추억이나 같이 보낸 흘러간 시간의 흔적은 없을 지라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만난 인연인 건 분명하다. 같은 한국인이면서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으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는데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의 내 생활 속에 함께 있는 이들과 단풍구경을 가자. 지금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과 함께 산으로 단풍놀이를 한창 떠날 것이다. 영국에 산이 없다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울창한 나무 숲이나 공원들이 집 근처에 많다.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들고 가을색으로 물든 공원으로 나들이를 간다면, 지금 집 창문 밖이나 길가에서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 ‘가을’의 기운을 발견할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는 가을, 그것을 즐기고 싶다면 혼자서 길을 나서는 것도 꽤 괜찮은 생각이다. 과거로의 여행이든, 지금 머리 속에 가득한 걱정거리에 대한 잡념의 연속이든 간에 가을이라 괜찮을 수 있는 ‘고독’에 빠져본다면 위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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