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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2 17:21
쉴트호른(Schilthorn) 정상에 서보기 – 스위스 인터라켄
조회 수 5335 추천 수 54 댓글 0
스위스를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밀라노로 향했다. 6월이었지만 이탈리아의 날씨는 충분히 무더웠으며, 조금이라도 북쪽으로 가는 것이 금방이라도 더위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심신의 피로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베니스에서 며칠을 머문 후 아침 일찍 밀라노로 가 스위스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무더위 때문에 그늘을 찾아 다니기에 바빴지만 이탈리아의 사람들의 생기와 활달한 성격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유럽권의 나라보다 항상 따뜻하고, 바람과 비가 많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늘 맑은 날에서 살고, 이것이 타국의 사람들이 보기엔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이탈리아인들의 쾌활한 성격을 만든 듯 하다. 기차여행은 언제나 설레임을 가져다 준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버스보다 편하고,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고속버스보다 일반적으로 창 밖의 볼거리가 많다. 레일 위를 달리기 때문에 혼잡이나 정체에 대한 걱정도 없다. 무엇보다 기차가 내는 소리에는 특별함이 있다. 오래된 기차처럼 ‘칙칙폭폭’ 소리를 더 이상 내지 않지만 서고 출발할 때나, 운행 중에도 기차바퀴가 레일과 닿고, 차축이라고 불리는 바퀴를 고정하는 축의 움직임 때문에 기차는 항상 일정한 소리를 내게 된다. 행여나 터널을 지나 갈 때면 그 소리는 더욱 증폭되어 심장의 규칙적인 박동을 스스로 느끼는 것처럼 기차의 박동소리를 크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소리는 지하철이나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나는 소음과 다르다. 소리의 크기는 같을 수 있으나 기차에서 나는 소리는 다른 운행수단처럼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마냥 어딘가 행복한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상하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느끼는 지 몰라도 기차여행은 나에게 항상 즐거운 일이다. 스위스로 가는 기차 안은 조용했고, 기차 한 칸 안에는 나와 미국인 여행자 한 명 만이 앉아 있었다. 스위스로 향하면서 창 밖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높은 산이 많아지고 평지를 달리던 기차는 산과 산 사이를 통과하기 시작했고, 넓은 하늘이 보이는 대신 높은 산기슭에 지어진 스위스다운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던 나에게 그 풍경은 마치 내가 영화나 달력에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이미지 속으로 들어 와버린 듯한 느낌이었고, 실제로 세상에 그런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 밖을 바라보는 데 빠져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꿈에서 금방 깬 듯 헐레벌떡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높은 산 꼭대기에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눈이 덮여있고, 집들은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예쁜 풍경을 만든다. 길가에 있는 작은 가게에는 스위스 밀리터리 나이프, 종 등과 같은 기념품을 팔고 있어 현지인만큼 관광객의 수가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유럽의 지붕이라는 융프라우가 있고 한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다는 매력과 함께, 때묻지 않은 자연이 살아 숨쉬는 듯한 이 곳을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봤던 관광객들과 달리 여기 인터라켄에 모여든 관광객들의 움직임은 느리다. 도시의 분위기에 맞게 꼭 산책을 나온 듯 걸음걸이가 느리고,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는 이도 없고, 그늘이 아닌 햇볕아래에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당장 그들과 같이 되어 이탈리아에서 수선을 떨며 그늘 속으로 들어가기 바빴던 습관적인 움직임을 버리고, 천천히 여유롭게 도시를 둘러 보았다. 정말 놀라운 자연이 거기에 있었다. 산장같이 생긴 숙소에서 하루를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쉴트호른을 오르기 위해 준비를 했다. 융프라우가 유럽의 지붕이라고 하나, 사실 융프라우에 올라 선명한 풍경을 보고 내려오기란 정말 어렵다고 한다. 높은 만큼 구름 낀 날이 많기 때문에 일년 중 단 몇 주만이 만족할만한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곳 관광 안내자들의 의견이다. 또한 쉴트호른에 오르면 유럽에서 가장 놓다는 융프라우 산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어 사실상 쉴트호른을 오르는 것이야 말로 융프라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융프라우가 아닌 쉴트호른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아름다운 풍경과 만년설을 가진 쉴트호른에서는 200개 정도의 알프스의 산봉우리를 둘러볼 수 있는데, 특히 아이거 , 묀히 , 융프라우요흐의 웅대한 모습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쉴트호른을 찾는 가장 큰 매력이다. 또한 007의 오래 된 시리즈 중 하나가 여기에서 촬영되어, 제임스 본드가 식사를 하던 회전식 레스토랑,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설경 등이 그래도 보존되어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쉴트호른은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기 때문에 색다른 풍경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올라갈 때에는 인터라켄에서 기차로 라우터브루넨까지 이동한 후 푸니쿨라를 갈아타고 그뤼트샬프 (Grutschalp)에서 하차, 이곳에서 다시 등반열차로 갈아타고 뮈렌 (Murren)으로 이동한다 . 마지막으로 뮈렌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비르크 (Birg)로 이동한 후 다시 쉴트호른 행 케이블카를 갈아타면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쉴트호른 케이블카의 각도가 상당히 높아 안전한 내부에 있어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스릴도 맛볼 수 있고, 그 길이 또한 길기 때문에 이동 중에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충분히 매료 될 수 있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는 종소리는 평화로운 마을에 흥겨움을 불어넣어 준다. 산 정상이라 추울 것이라는 생각에 긴 옷을 최대한 챙겨 입고 왔지만, 약간의 추위가 느껴졌다. 그래도 운이 좋아 햇살이 비치고 있었고, 산 정상에서 보이는 융프라우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제임스 본드가 머물렀을 수도 있는 의자에 앉아 눈 앞의 펼쳐진 웅장한 풍경을 하염없이 눈에 담아본다. 산 아래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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