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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은 중국 광둥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인 맏형을 따라 하와이로 가서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서구문물을 접했...
by 유로저널 / on Apr 10, 2008 07:15
쑨원은 중국 광둥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인 맏형을 따라 하와이로 가서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서구문물을 접했다. 그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중국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황제가 다스리는 보수적인 정치, 전통적인 방식만 고집하던 중국은 서구의 선진국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도 패하고 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는 중국의 현실을 가슴아파했고, 1894년 하와이로 건너가 흥중회(興中會)라는 조직을 결성해 무장봉기를 계획했지만 실패하여 16년에 걸친 긴 해외망명길에 올랐다. 쑨원이 망명생활을 하며 일본의 한 호텔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가 숙박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중산치아오(中山樵)라 적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이름의 의미를 묻자, 쑨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중산(中山)이란 중국의 산, 치아오(樵)는 나무꾼이라는 의미일세. 머지않아 중국 땅에 올바른 세상이 온다면, 내 조국의 강산에서 나무나 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뜻이라네.” 쑨원은 우수한 의학도였다. 그는 광저우와 홍콩에서 의학교 과정을 좋은 성적으로 마쳤고, 28세에는 병원을 열 수 있는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중국인으로서 현대식 양의가 되었다.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얻었고 병원도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패한 정치와 열강의 침략으로 혼란과 도탄에 빠진 조국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끝을 알 수 없는 험난한 혁명의 길을 택했다. 그는 유명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혁명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죽을 때까지 근대 중국을 열기 위해 헌신했다. 1911년에 일어난 혁명의 횃불은 중국 전체로 번져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었고, 중국 최초의 민주적 정치체제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세워졌다. 그러나 북부 지방은 아직도 청 조정의 지배 아래 있었다. 쑨원은 결단을 내려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인물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협상을 맺었다.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의 자리를 얻는 조건으로 청 제국을 무너트리기로 약속했고, 1912년 2월 황제가 폐위되었다. 다음날 쑨원은 임시 총통직을 사임했고, 초대 총통이라는 명예보다 중국 국민 전체가 주인이 되는 새로운 중화민국의 수립을 더 크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고자 했고 중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쑨원은 다시 전투에 들어갔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던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변화된 중국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쑨원, 그가 죽은 지 이미 80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거기서 우러난 삼민주의 정신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옛 위인들의 삶을 자세히 돌아보면 그들의 삶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남다른 그들의 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상을 배우면 그들의 삶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지혜의 보고인 성경은 우리의 삶보다 우리 마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마음이 바뀌어야 삶이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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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news-강운학 목사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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