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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어질고 겸손한 왕후였다. 그런데 위에 오른 지 6년이 되도록 왕자를 낳지 ...
by 한인신문 / on Sep 08, 2009 17:00
조선 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어질고 겸손한 왕후였다. 그런데 위에 오른 지 6년이 되도록 왕자를 낳지 못해 충심으로 왕에게 장희빈을 천거하였으나, 오히려 왕의 총애를 입은 장희빈의 모함으로 쫓겨나 6년 동안 안국동 본가에서 칩거하였다. 거기서 그는 조금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폐위를 하늘의 뜻으로 받들어 근신하는 삶을 살았다. 장희빈은 포악하고 질투가 많은 못된 여자였는데, 왕자를 낳자 모략과 흉계를 주저없이 꾸몄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어 쫓았을 때에 온 백성과 산천초목이 다 울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지은 노래가 곧‘미나리와 장다리’였다. “장다리는 한철이나 미나리는 사철이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메꽃 같은 우리 딸이 시집 삼년 살더니 미나리 꽃이 다 피었네" 장다리는 키가 크지만 한 철로 곧 시들고, 미나리는 얼음장 밑에서도 푸르다. 한결같이 진실된 마음이 있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왕은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소리도 듣지 않고 오직 장희빈의 말만 들었다. 송시열, 박태보를 죽였고, 민비를 폐위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장씨의 포악한 인간성이 드러나면서 숙종은 눈을 뜨게 된다. 장씨의 죄악상을 바로 보게 되었고, 민비와 충신들의 충절을 기억하게 되었다. 드디어 숙종은 어진 민비를 폐출시킨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이에 다시 민비를 복위시켰지만, 6년 동안이나 죄인을 자처하며 폐서인생활을 하였던 인현왕후는 복위 후에도 건강을 찾지 못한 채 8년 후에 숙종이 매우 슬퍼하는 가운데 35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한편, 쫓겨난 장희빈은 궐내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하고 인현왕후의 화상을 그려 거기에 화살을 쏘고 염하는 등 온갖 저주를 다했다. 왕후가 죽으면 다시 자기가 왕후의 위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비 사후, 이 사실이 탄로나서 왕은 사약을 내려 장희빈을 죽였다. 인현왕후가 죽은 후 숙종도 뛰어나게 선정을 베풀어 성군이 되었다. 비운의 왕자인 균이나 연잉군도 인현왕후가 베푼 사랑과 덕을 잊지 못하여 비뚠 길로 가지 않았다. 한 여인의 보이지 않는 덕이 왕들을 바로잡고 왕실과 나라를 바로 세우는 모습을 본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남을 해하는 거짓을 만드는 일들이 횡행한다. 그러나 장다리는 한 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는 말처럼, 결국 거짓은 시들어버리고 진리만이 세워진다. 진리만이 우리에게 참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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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news-강운학 목사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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