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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36)
   독일과 유럽통합 (1)

       지난 호에서는 유럽연합 관련 기구인 유로폴 (유럽경찰)과 유로저스트 (Eurojust)를 분석했다. 유럽연합이 상품과 서비스, 노동자를 포함한 일반 시민과 자본이 거의 자유롭게 이동하는 국경없는 단일시장을 이루다 보니 범죄인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따라서 마약과 조직범죄, 돈세탁 등을 다루기 위해 회원국들이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유럽체포영장 (European Arrest Warrant)도 도입돼  범죄인의 경우 한 회원국이 발부한 체포영장이 다른 회원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번에는 유럽통합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온 독일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 서독을 의미함)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2차대전 종전이후부터 1959년까지 유럽통합정책을 상술한다.
       유럽대륙의 심장에 위치한 독일은 현재 유럽연합 25개 회원국 가운데 최대의 경제대국이다. 인구도 제일 많은 8천2백만명이다. 2차대전 종전이후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 등이 실시한 독일문제의 해결과 독일의 유럽통합정책이 분석의 핵심이다.

         <독일과 유럽통합 주요 연표: 2차대전 이후부터 1969년까지>

       1945년 5월 8-9일: 나치 독일 무조건 항복 (소련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4개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령함)
       1945년 5월: 1949년 초대 총리가 된 콘라트 아데나워 쾰른시 시장으로 취임 (그해 10월 영국 군정은 업무태만을 이유로 그를 시장직위에서 해임함)
       1948년 3월: 서유럽 부흥계획인 마샬 계획 시행에 들어감.
        1948년 3월: 브뤼셀 조약 체결됨 (영국과 프랑스, 베네룩스 3개국이 독일과 소련의 위협에 대해 집단안보를 주요내용으로 함)
        1948년 5월: 국제루르기구 (International Authority for Ruhr) 설립됨 (석탄산지인 루르지역의 석탄생산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기구임-미국,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참가함).
       1948년 6월20일: 서방 점령국 지역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화폐개혁이 실시됨.
      1948년 6월23-24일---1949년 5월12일: 베를린 봉쇄 혹은 공수 (4백62일간 소련은 서방 점령지역에서 베를린으로 이르는 육로를 차단함. 따라서 미국, 영국 점령군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식량과 보급품 등을 공수지원해줌)
       1948년 9월1일 : 콘라트 아데나워 제헌헌법을 제정할 의회평의회 (Parlamentarischer Rat) 의장이 됨 (의회평의회는 1948년 9월부터 1949년 5월까지 활동함).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조약 체결됨.
       1949년 5월8일 서독 건국 (동독은 같은 해 10월7일 건국됨).
       1949년 5월 23일: 기본법 (Grundsetz: 헌법)이 공포됨.
       1949년 9월15일: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 취임.
       1950년 5월: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가입협상이 시작돼 이듬해 회원국으로 가입
        1952년 5월: 유럽방위공동체 서명 (1954년 프랑스 의회는 비준을 거부함)
       1958년 : 유럽경제공동체 (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 회원국이 됨 (서독과 동독간의 교역을 내부교역으로 인정받는 조항을 삽입함).
       1959년: 야당이 사민당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유럽통합 지지로 정책을 변경함.
      
1) 제로의 시간 (Stunde Null)과 ‘유럽’이라는 구원
      
       1945년 5월8일 나치정부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4천만명이 숨진 2차대전은 종결되었다. 연합군의 공습으로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거의 독일의 모든 도시가 폐허가 되다시피했다. 독일 역사에서 이 시기는 ‘제로의 시간’ (Stunde Null)이라고 불린다. 히틀러 정권은 2차대전을 일으켜 패배하고 6백만명이 넘는 유태인을 학살했다. 이런 죄과로 독일은 민족국가라는 틀로 유지하지 못하고 4개 연합군에게 점령당했다.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 헨리 모겐쏘 (Henry Morgenthau)는 전후 독일을 처리하기위한 방안의 하나로 독일을 영원히 농업국가 (pastoralisation)로 만들자는 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산업시설을 다시 재건하면 또 전쟁을 일으킬지 모르니 아예 전쟁의 싹을 뿌리채 뽑아내자는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채택되지 않았지만 독일의 전후처리에서 소련과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에서 이런 안이 준비됐다는 것은 독일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1,2차 대전의 책임이 있고 침략을 일삼는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독일문제)가 서방 연합국이 직면한 주요 정책의 하나였다.
       소련과 서방3개 연합군은 독일의 전후처리문제를 많이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3개 연합군은 점차 점령지역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합,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 1948년 6월20일 이 지역에서 제국마르크화를 폐기하고 독일마르크 (Deutsche Mark: DM)를 도입하는 화폐개혁이 있었다. 소련은 이를 핑계삼아 베를린에 이르는 육로를 차단했다. 베를린시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의도였다. 지도에서 보면 베를린은 독일의 거의 제일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베를린에 이르는 길목을 막아버렸으니 베를린은 고립무원의 도시가 되었다. 당연히 서방연합군은 이를 소련의 도발로 간주, 수송기를 동원해 4백62일간 베를린 시민들에게 식량과 의료품 등을 공수해 주었다. 결국 소련은 다시 길목을 터주었다. 이런 대결을 거치면서 소련과 서방3개국은 통일독일 건설에 합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1949년 서독과 동독이 각각 건국되었다.
       베를린 공수를 겪으면서 미국은 서독을 국제사회로 복귀시키고 재무장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서독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키워 다시 재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차대전에서 독일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이런 제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독재무장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또 1949년말부터 프랑스의 지도부도 독일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1차대전 종전이후처럼 보복정책은 효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석탄과 철강의 공동생산과 관리였다. 물론 1948년 프랑스의 제안으로 국제루르기구가 설립돼 활동했다. 즉 이런 성격의 기구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독일의 루르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탄과 철강을 연합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기구였다.
       결국 1950년 5월9일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 (Robert Schuman)은 유럽통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장모네 (Jean Monnet)의 도움을 받아 슈망선언을 발표했다.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중요하다며 중요한 전략물자이자 전쟁수행에 필수자원인 석탄과 철강을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생산하고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다른 나라들도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즉 프랑스의 지도부가 독일을 제어하기 위해 독일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고 독일을 제어하는 공동의 기구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독일문제는 유럽통합을 가능케 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또 독일문제 해결에는 미국과 프랑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독일을 재무장시키고 국제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서방의 이익이라고 여겼다. 반면에 프랑스는 독일을 제어하기 위해 기구를 만들었다.
       당시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프랑스 제안 이전에 이미 프랑스와의 연합 등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하루빨리 연합군의 점령에서 벗어나 국제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유럽통합에 매우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다. 아데나워 총리는 친서방정책 (Westbindung)을 실시했다. 유럽통합에 적극 참여하고 미국 주도의 서방에 가담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당시 야당인 사회민주당이나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발행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가입을 반대했다. 서독을 재무장, 분단이 더 고착화된다는 이유에서 였다. 일부는 동.서독 전체를 중립국으로 해서 통일하는 방안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 총리의 견해는 달랐다. 서독을 비롯한 서방 여러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번영을 누리게 되면 공산권을 자석처럼 흡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석 – magnet - 이라는 용어를 씀). 1980년대 영국의 마가렛 대처총리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힘의 우위 정치’를 내세워 소련을 압박한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경제통합과 비슷한 시기에 독일 재무장 문제도 추진되었다. 1950년부터 미국은 독일 재무장 문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군 전체를 유럽군으로 소속시키고 프랑스나 베네룩스 군은 일부만을 유럽군에 소속시키는 안을 제안했다. 어디까지나 프랑스가 주도가 되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를 골자로 하는 유럽방위공동체 (European Defence Community: EDC) 조약이 1952년 5월 체결되었다. 그러나 2년후 프랑스 의회는 비준을 거부했다. 미국이 제안한 독일 재무장안을 거부하고  프랑스가 대응 제안한 유럽방위공동체를 프랑스 의회가 거부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미국은 유럽이 하루빨리 독일 재무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유럽주둔 미군 문제를 재검토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앤쏘니 이든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영국이 독일에 육군과 공군을 주둔시킨다. 프랑스 의회가 유럽방위공동체 비준을 거부한 주요 이유중의 하나는 영국이 이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를 감안, 프랑스 정부를 안심시키고 미군의 유럽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제안을 했다. 영국은 유럽대륙에 군을 오랜기간동안 주둔해본 적이 없었다. 전통적인 세력균형의 원칙에 따라 전쟁이 나면 참전, 이를 해결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영국이 독일에 약 6만명 정도의 군을 상주키로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영국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또 독일은 서유럽연맹 (West European Union)에 가입한 후 1955년 나토에 가입했다. 독일군 전체가 나토에 편입된 셈이었다. 이로써 독일 재무장 문제가 해결되었다.

  2) 유럽경제공동체와 야당인 사민당의 유럽통합 수용
       유럽경제공동체는 석탄과 철강부문의 단일시장 (회원국간에 석탄과 철강을 관세나 수량제한이 없이 자유롭게 교역)을 경제분야 전체로 확대한 것이다.  1956년부터 이듬해까지 1년정도 협상을 계속했다. 협상와중에 독일 정부는 경제통합  방식을 두고 크게 두가지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다. 유럽통합을 진전시켜야 한다는 데는 모두 다 동의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부 장관은 자유무역지대 설립을 통한 경제통합을 지지했다. 반면에 외무부나 아데나워 총리는 관세동맹 방안을 지지했다. 전자의 경우 회원국간에 아주 낮은 관세 ,혹은 관세가 없으나  회원국은 비회원국에 대해서 상이한 관세를 매길 재량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관세동맹은 비회원국에 대한 관세권도 회원국간에 공동으로 결정한다. 즉 회원국이 관세를 매길 권한을 상실하게 된다. 당시 독일은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또 석탄철강공동체 회원국 (독일을 포함 프랑스, 베네룩스 3국) 과의 교역에서 보다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더 많은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회원국에 대해서도 상이한 관세권한을 보유하고 있고 덜 차별적인 자유무역지대가 경제통합의 올바른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데나워 총리나 외무부는 6개국이 합의한 관세동맹을 통한 경제통합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결국 많은 논란을 벌이다가 관세동맹을 통한 경제통합이 합의됐다.
       야당인 사민당은 기민당 아데나워 총리가 실시해온 유럽통합정책을 반대했다. 독일이 유럽통합에 적극적이고 나토에 가입하면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잇따라 총선에서 패배하고 사민당 원로들도 물러나면서 사민당은 점차 근대적인 전 계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변모했다. 이에따라 1959년 본 인근의 바크 고데스베르크에서 유럽통합을 수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로써 독일의 주요 정당간에 유럽통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직도 영국은 노동당이나 보수당내, 혹은 노동당과 보수당간에 유럽통합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다. 이에따라 유로화 가입이나 유럽통합 문제를 당리당략적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독일은 유럽통합 초기에 양대 정당간에 유럽통합이 국익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 정부는 국내정치적인 제약에서 비교적 벗어나 유럽통합에 적극적인 정책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서는 1960년대 독일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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