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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0 21:10
독일과 유럽통합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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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는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유럽통합 정책을 분석했다. 실용주의자로서 경제위기 극복에 주력했던 슈미트는 유럽통화체제를 설립, 통합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번에는 헬무트 콜 총리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1982년 10월 취임부터 1989년 전반기까지를 상술한다. <독일과 유럽통합 주요 연표: 1982-1989년까지> 1982년 10월1일: 헬무트 콜 총리 취임 (기민/기사당-자민당이 헬무트 슈 미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킴. 10월 13일 취임사에서 나토의 이 중결정 실행과 동독과의 관계 지속을 발표) 1983년 1월20-21일: 독불친선조약 2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림. 1983년 3월6일: 조기총선에서 기민/기사당-자민당이 과반수를 확보, 연 립정부를 구성함. 1983년 11월22일: 독일 하원, 미 중거리 미사일의 서독 배치 승인. 1984년 9월22일: 1차대전 격전지 베르덩에서 콜-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화해의 손을 잡음 (독불 화해의 상징이 됨) 1986년 10월15일: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히틀러 정권의 선전부장관 괴벨스와 비유. 소 련과의 관계가 악화됨. 1987년 1월25일: 총선에서 기민/기사당-자민당 과반수 확보, 다시 연립 정부 구성. 1987년 9.7-11일: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서독을 공식방문. 서 독과 환경보호, 연구협력 협정 등을 체결함. 1987년 12월8일: 미소간에 중거리핵미사일 폐기조약 서명 1988년 11월: 헬무트 콜 총리와 프랑스의 프랑스와 미테랑 대통령, 유럽 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칼 대제상 공동수상함. 1989년 6. 12-14일 : 고르바초프 서기장 서독을 공식방문 ‘통일의 총리,’ ‘최장수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손자.’ 헬무트 콜 총리에게 따라다니는 별칭이다. 1982년 10월 1일 당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재는 총리에 취임했다.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집권중인 총리를 야당이 공모, 불신임 투표를 통해 해임시켰다. 이처럼 콜 총리의 취임은 초기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콜은 기민당 총재로 일해왔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민/기사당-자민당은 헌법에 보장된 건설적인 불신임 투표를 활용했으나 졸지에 여당에서 야당이 된 사민당은 새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헬무트 콜은 16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1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는 14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서방 주요 국가에서 콜 총리처럼 오랫동안 정부수반을 지낸 사람은 매우 드물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는 11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헬무트 콜에 대한 연구는 매우 많다. 그의 국내정책과 유럽통합 정책 등 모든 분야가 학자들의 관심사이다. 1) 나토의 이중결정, 독불화해와 단일유럽시장 지난 호에서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실각하게 된 주요 원인중의 하나가 나토의 이중결정임을 설명했다. 즉 슈미트 총리는 소련이 유럽에 증강 배치한 중거리 핵미사일에 대항,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도 중거리 미사일을 증강하면서 동시에 소련과 협상도 한다는 이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사민당내 좌파는 이를 반대했다. 결국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은 사민당과 경제정책에 대한 견해가 매우 달랐다. 또 이중결정을 지지했는데 사민당이 이를 의회내에서 통과시킬 수 없으리라고 확신, 기민당/기사당과 새로운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헬무트 콜 신임총리는 1982년 10월 취임사에서 나토의 이중결정을 이행하겠다고 선언했다. 1983년 3월 총선에서 이 이슈를 공약으로 채택, 이중결정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운 사민당을 이겼다. 이어 1983년 11월 의회에서 이중결정을 통과시켰다. 3월 총선에서 녹색당은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1월 의회에서 이중결정 문제를 논의할 때 당시 녹색당의 젊은 의원이자 68년 학생운동 세대였던 요시카 피셔의원은 콜 총리를 ‘핵로켓 총리’ (Raketenkanzler)라고 부르며 이중결정에 강력반대했다. 콜 총리는 1982년 10월 취임 직후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다. 이 방문에서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며 두 나라가 서로 협력, 유럽통합을 이끌자는 논의를 했다. 전임자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지스카르 데스텡 프랑스 대통령과 쌍두마차를 이루어 유럽을 이끌었다. 1981년 5월 프랑스에서 최초의 사회당 출신의 대통령 프랑스와 미테랑이 취임했다. 그러나 슈미트 총리와 미테랑대통령간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미테랑 대통령도 집권 초기에는 대폭적인 복지확대와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 국내 정책에 신경을 쓰느라 유럽통합정책에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미테랑 대통령도 서독의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인상을 주기에 이르렀다. 1983년 1월 불독친선조약 체결 20주년을 맞아 미테랑 대통령은 독일 의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 연설에서 미테랑은 나토의 이중결정이 서유럽의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며 이를 적극 지지했다. 사회당 출신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당시 야당인 사민당은 이중결정에 반대했다. 따라서 총선을 앞둔 독일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이중결정 지지를 당론으로 내세운 기민당/기사당-자민당을 지지했다. 미테랑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로 긴밀하게 협력, 유럽통합을 단계적으로 진전시켰다. 1984년 상반기 프랑스는 유럽정상회담과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을 맡았다. 6월 이를 결산하는 정상회담이 파리교외 퐁텐블로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지난 5년간 유럽공동체 업무를 거의 마비시켰던 영국예산문제가 해결되었다. 당시 상대적으로 가난한 영국이 유럽공동체 예산에 너무 많은 돈을 납부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 영국이 납부하는 돈의 2/3를 환불해주는 식으로 결정이 되었다. 미테랑과 콜은 영국예산문제를 해결해야 유럽공동체의 진전을 논의할 수 있다는데 사전 합의했다. 또 영국예산문제를 해결하면서 유럽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정부수반 대표로 이루어진 임시위원회를 구성,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되었다. 미테랑 대통령과 콜 총리가 이런 문제를 사전에 합의, 정상회담에서 다른 회원국들의 지지를 얻은 셈이다. 그 해 9월 1차대전의 격전지로 프랑스와 독일 군인 수십만명이 숨을 거둔 베르덩에서 두 지도자는 두 손을 맞잡았다. 이런 모습은 2차대전이후 전개된 독불화해를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진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1985년 3월 이 위원회는 유럽공동체의 원래 목표이었던 단일시장을 완성하기 위해 정부간회의 (Intergovernmental Conference: IGC)를 소집할 것은 공식건의했다. 1958년 발효된 경제공동체를 설립하는 로마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1985년 후반기 정부간회의가 열려 그 해 12월 단일유럽법 (혹은 단일유럽의정서)을 채택하게 되었다. 1992년 12월31일까지 회원국간에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을 이룩하기 위해 각 종 비관세장벽을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통합을 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단일시장 완성을 제시했으며 다른 회원국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영국의 마가렛 대처 정부는 많은 비관세장벽을 제거하는 단일시장 완성이 국내에서 실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부합한다며 영국모델을 유럽에 수출하겠다는 야심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2) 소련과의 관계개선: 통일의 전환점 유럽공동체는 단일유럽법 채택으로 단일시장 완성을 위해 나아갔다. ‘1992’라는 표어를 내걸고 각 회원국 정부는 시민들과 기업들에게 국경없는 단일시장의 이점을 적극 홍보했으며 내부시장 완성에 필요한 각 종 법적조치를 이행해 나갔다. 헬무트 콜 총리는 유럽통합정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동독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소련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했다.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엘 고르바초프는 글래스노스트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서방 여러나라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진정한 개혁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헬무트 콜의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은 고르바초프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 (자민당)은 1986년 초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그리고 이를 지지하자’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1986년 10월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를 나치의 선전부장관 괴벨스에 비유했다. 즉 그의 개혁정책이 알맹이가 없고 선전용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당시 소련정부는 이런 발언에 대해 발끈했고 사과를 요구했으나 콜은 사과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회고록에서 이때까지 서독을 미국의 추종자로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1985년 3월 취임 후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했지만 서독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유럽통합에서 중심역할을 하며 나토에서 가장 많은 재래식 군을 보유하고 있는 서독과의 관계를 정상궤도에 올려 놓는 것이 필요했다. 물론 동독 사회통일당 에리히 호네커 총재가 1987년 9월 서독을 방문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기민당/기사당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1982년 집권 후 동방정책을 계승, 점진적으로 실천했다. 1987년 12월 소련과 미국은 중거리 핵미사일 (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폐기협정에 서명했다. 서로를 겨냥하고 있는 중거리 미사일을 모두 폐기한다는 내용이다. 미소간에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서독정부도 이를 적극 활용했다. 1988년 9월 콜 총리가 소련을 공식방문했다. 이어 1989년 6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서독을 답방했다. 그는 방문하는 곳마다 서독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답방으로 그동안 소원했던 서독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일련의 정상회담에서 서독정부는 개혁정책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소련정부를 적극 지원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독정부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수정주의라며 반대하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정부는 소련정부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며 많은 경제지원을 제공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은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에 인색했다. 그러나 독일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경제지원을 적극 활용했다. 또 이런 지렛대를 기반으로 동독과의 관계도, 나아가 통일에도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다음호에서는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정책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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