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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9 20:22
독일과 유럽통합 (9)
조회 수 4878 추천 수 1 댓글 0
지난 호에서는 1990년 통일 이후 1998년 총선에서 패배, 물러나기 까지 헬무트 콜 총리의 유럽통합 정책을 분석했다. 경기침체와 영국 파운드화의 탈퇴 등 여러 위기가 중첩되면서 유럽통합은 기존에 이룬 것을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번에는 1998년 10월 총리로 취임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독일과 유럽통합 주요 연표: 1998-2005년까지> 1998년 9월27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민당 총리 후보, 총선에서 기민 당의 헬무트 콜 후보를 이기고 총리가 됨. 1998년 10월27일: 슈뢰더 7대 총리로 취임. 1999년 3월 19일: 나토, 코소보 공습 개시. 1999년 4월12일: 슈뢰더 사민당 총재가 됨. 2002년 8월28일: 총선유세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하지 않 겠다고 발표. 2002년 9월22일: 총선에서 2표 차이로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 2002년 10월22일: 총리로 재취임. 2005년 5월: 2006년 가을 예정인 총선을 1년 앞당겨 실시한다고 발표. 개 혁정책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는 것이 조기총선 강행 이유 ( 40여년간 사민 당이 집권했던 라인란트-베스트팔렌주 지방선거에서 사민당 참패). 2005년 9월18: 총선에서 기민당/기사당은 사민당보다 겨우 4석을 더 얻 는데 그침. 오랜 협상끝에 기민당/기사당-사민당의 대연정 출범. 1998년 9월27일 독일 정치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16년간 총리를 역임했던 헬무트 콜이 ‘애송이’라고 조롱했던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후보에게 패배, 총리자리에서 물러났다. 슈뢰더는 1944년 생으로 전후세대에 속한다. 부총리이자 외무장관이 된 요시카 피셔도 마찬가지로 전후세대이다. 16년간 야당으로 정치적 황무지에서 헤매던 사민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민당/녹색당 최초의 적녹정부에 대한 주변국의 우려도 많았다. 1) 정치적 황무지에서 여당으로 그리고 정책의 연속성 이전의 3회 연재에서 헬무트 콜 총리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했다. 1982년 10월 총리에 취임한 기민당의 콜 총리는 1998년 9월 선거에 패배할 때 까지 장장 16년간 전후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반면에 제1야당 사회민주당은 무려 16년간 정치적 황무지에서 야당으로 지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독일 배치에 반대하기도 했다. 또 통일방안을 놓고 점진적인 통일을 선호했으나 동독의 유권자들은 신속한 흡수통일을 내세운 기민당을 찍었다. 이처럼 정치적 황무지를 거치면서 사민당은 총리후보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oeder) 니더작센주 주지사를 내세웠다. 당시 사민당의 총재는 오스카 라퐁텐 (Oscar Lafontaine) 이었다. 라퐁텐은 정통 좌익의 이미지가 강했고 슈뢰더는 '화면발이 잘 받는' (photogenic) 친근한 이미지였다. 결국 슈뢰더는 1998년 9월 총선에서 승리, 녹색당과 최초의 적-녹연정 (Red-Green Coalition)을 구성했다. 녹색당은 1983년 연방하원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이어 주차원에서는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으나 연방정부 차원에서 여당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독일의 우방은 새로 출범한 적-녹연립정부가 외교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할 까라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녹색당의 반전주의는 유명했다. 그리고 사민당 내에서도 좌파 등이 강했기 때문이다. 슈뢰덩 총리 자신도 1968년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위에 적극 참가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68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점을 의식, 슈뢰더 총리는 1998년 11월 취임연설을 통해 유난히 외교정책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유럽통합에 적극적이며 이제까지의 다주자의 외교노선을 지키겠다. 그러면서도 "독일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됐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적-녹 연립정부가 가장 먼저 직면한 외교정책의 시험무대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의 코소보 공습이었다. 1999년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에 거주하는 알바니아인에 대해 조직적인 집단학살을 교사하고 방치했다. 코소보의 대다수는 알바니아인이다. 그런데 90년대초 밀로세비치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자치를 빼앗았고 소수였던 세르비아인이 이 주를 주물렀다. 이에따라 알바니아인들은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이러면서 알바니아게 코소보 주민에 대한 조직적 학살이 시작됐다. 미국을 주도로 하는 세르비아와의 협상이 실패하자 나토는 1999년 3월 일 코소보 공습을 개시했다. 물론 유엔 안보리의 결의가 없는 상황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오스카 라퐁텐 사민당 총재는 이에 항의해 재무장관직을 그만두었다. 반전주의가 모토인 소수연정파트너 녹색당도 들끓었다. 유엔 결의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다니! 아무리 인종청소가 자행된다고 하니 어디까지나 국제법이 있다. 왜 이를 무시하면서 공습을 감행하는가 하는 논리였다. 독일정부는 나토의 회원국으로서 코소보 공습에 참여했다.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전투기가 나토 회원국이 아닌 다른 나라 공습에 참전했다. 1991년 걸프전이 발생했을 때 헬무트 콜 독일 정부는 헌법에서 나토회원국외의 군사파견을 금지하고 있다며 막대한 재정지원만을 제공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1999년 3월 독일정부는 과감하게 공습에 참가했다. 이런 참전으로 당시 출범한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슈뢰더 정부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사민당내 라퐁텐을 필두로 하는 좌파의 공습반대, 녹색당의 반발. 오스카 피셔 외무장관 (녹색당) 은 임시 소집된 전당대회에서 달걀세례를 받으면서도 공습의 필요성을 역설, 겨우 연정 붕괴의 위기가 수습되었다. 1999년 5월-6월 필자는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사민당과 녹색당 의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수는 연립정부의 붕괴가 머지 않았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그만큼 코소보 공습을 둘러싼 연립정부내의 위기가 심각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1999년 상반기 독일은 순회의장국 (유럽이사회와 각료이사회)을 역임했다. 유럽연합의 동구권 확대를 앞두고 마련된 재정전망 (Financial Perspective) 2000-2006 은 1998년 1년간 협상을 거듭했지만 매듭짓지 못했다. 코소보 공습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스캔달 때문에 유럽연합 집행위원 전원 사임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독일정부는 이런 유럽연합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전망을 타결지었다. 유럽연합 예산에 가장 많은 돈을 내는 회원국으로 예산납부액을 많이 줄이려했으나 다른 회원국들의 반발이 심했고 또 위기에 처한 유럽연합을 감안, 많은 액수를 삭감하지 못했다. 2) 실업과 개혁부진, 조기 총선 소집 슈뢰더는 1998년 7-8월 총선을 앞둔 선거에서 헬무트 콜 정부의 경제정책이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총리에 취임한이후 슈뢰더는 실업률을 낮추고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기간중 실업자수는 무려 5백만명이 넘었으며 실업률도 11%가 넘었다. 또 실업급여 축소와 연금증가 등을 골자로 하는 그의 개혁안은 번번히 노조등의 반대에 직면했다. 2002년 9월 총선에서 슈뢰더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개표결과가 엎치락 뒤치락하는 가운데 야당인 기민당/기사당보다 겨우 2표가 많은 표를 얻는데 그쳤다. (프랑스에게 이끌려 농업정책 미진한 개혁 승인, 영-프 논쟁) 일부에서는 슈뢰더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결코 참전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총선에서 이겼다고 주장한다. 또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반미카드를 활용했다고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독일의 유럽통합정책 혹은 외교정책의 기조를 외면한 비난이다. 1, 2차 대전의 책임이 있는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반전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이다. 당시 독일국민의 대다수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반대했다. 슈뢰더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총선에서 이 카드를 활용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여론에 부화되동한 것은 아니라 자신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 또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정책이 많은 문제점을 수반하리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2003년 2월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에서 피셔 외무장관과 미국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의 이라크 문제를 두고 벌어진 설전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피셔장관은 “이라크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지 않는데 왜 침략을 하는가. 국민들에게 왜 침략을 해야 하는지 설득해야 하는데 설득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이 장면은 전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다. 이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두고 유럽이 영국과 이탈리아, 동구권 신규회원국을 중심으로 하는 친미와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로 분열되었다. 럼즈펠드는 독일과 프랑스를 ‘구유럽’으로 폄하하며 문제가 있는 나라들이라고 규정지었다. ‘구유럽’과 ‘신유럽’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나 슈뢰더의 반미노선은 유럽통합 정책에서 독일의 운신폭을 매우 좁게 만들었다. 2002년 9월 총선에서 겨우 이긴 슈뢰더는 프랑스와의 관계에 집중했다. 자신의 반미노선을 강화하는데 프랑스가 동맹이었다. 또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자당내 좌파와 기민당/기사당 등 야당의 비난을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외교정책에서 성과가 필요했다. 1998년 취임이후 독일-프랑스 관계의 걸림돌은 공동농업정책의 개혁이었다. 프랑스는 공동농업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로 급격한 가격보장량 삭감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동구권 확대에 따라 가난한 나라들이 가입한다. 그리고 폴란드나 헝가리 등 이들 신규 회원국은 농민의 비중이 높고 매우 가난하다. 이때문에 공동농업정책을 개혁해야 가난한 나라들을 더 도와줄 수 있다. 독일은 공동농업정책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프랑스는 이를 반대했다. 재선 직후 슈뢰더는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만나 점진적인 공동농업정책 개혁에 합의했다. 이어 2002년 10월 열린 브뤼셀 정상회담에서 두 수반이 사전협의를 통해 2013년까지의 공농농업정책을 제시, 관철시켰다. 당시 이 개혁안에 대해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매우 격노했다. 2010년까지 유럽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식경제로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유럽연합 전체 인구의 5%에 남짓한 농민을 위해 유럽연합 예산의 40%정도를 지출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공동농업정책에 지출되는 돈을 과감하게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나 덴마크 등 잘살면서도 공동농업정책의 혜택을 받는 나라들은 이 정책의 개혁을 그리 바라지 않았다. 결국 블레어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이 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자신보다 10살이나 더 어린 블레어의 직설적인 말에 시라크는 매우 화가 나 “그 어느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며 11월 예정이었던 영-불 정상회담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재선에 성공한 슈뢰더 였지만 2005년 9월 총선이 있을 때까지 그는 레임덕에 시달렸다. 실업급여 축소와 연금수령액 축소 등 주요 개혁안은 노조와 야당의 반대로 통과되지 않았다. 또 개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잇따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슈뢰더의 사민당에게 ‘노’표를 던졌다. 7년간 총리를 역임한 슈뢰더는 외교정책과 유럽통합정책에서는 정책의 연속성을 지켰다. 유럽통합에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일부에서의 우려와 달리 일방주의적인 정책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물론 반이라크 정책때문에 불가피하게 프랑스와의 관계는 긴밀해 졌다. 또 1999년 상반기 순회의장국이었을 때 경제적 손해를 무릅쓰고서라도 재정전망 2000-2006 을 타결지었다. 다음호에서는 이번 연재를 마감하면서 유럽통합을 전망해본다. 안병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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